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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와 듣기의 권력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살다 보면 황당한 경우를 당하기도 한다. 사회적인 관계에서 나이가 좀더 많다는 이유로, 남자란 이유로 어린 사람이나 여자에게 반말하는 습관을 가진 이를 만날 때가 그렇다. 심지어 외국 영화의 자막 번역에서도 이런 황당한 경우가 발생한다. 반말·존댓말 구분이 우리 같지 않은 영어나 프랑스어가 한글 자막으로 번역될 때 남자인물 대사는 주로 반말로, 여자인물 대사는 존댓말로 번역되는 일도 벌어진다. 나 역시 사회에서 만난 나이 든 남자들로부터 반말 세례를 받을 때가 있다. 여러번 당하다 보니 이젠 기분이 상하는 차원을 넘어 그런 어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의식을 관찰하는 여유가 생기게 됐다.

우리말에 반말과 존댓말이 있는 이유는 어린 사람이나 여자를 함부로 대하라는 뜻이 아닐텐데 나이와 성별이 권력이 되다 보니 무례한 반말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리거나 여성인 경우는 자신의 발언권을 제대로 구사하기 참 힘들다. 설령 발언권을 행사해도 강압적 말하기를 가진 권력자 남성에게 잘리거나 말이 많다는 핀잔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말하기가 보여주는 권력관계는 존댓말·반말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도 매스컴을 통해 주로 강자의 말이 전달된다. 그것에 대해 약자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국가 간의 대화에서도 힘에 의해 강자만이 무례하게 떠들어대는 일이 전지구적 민주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연일 매스컴에서 중계되는 대선 후보자들의 말 잔치, TV 토론회 등 말하기의 권력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선거철이다. 침묵하는 다수가 드디어 한 표로 힘을 발휘하는 희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대선 주자들의 이력과 정책, 공인으로서의 자질과 리더십 등 여러 가지 요건들이 검증되고 있다. 그런 것들이 내용이라면, 그것들을 담아내는 형식이 말하기 방식과 태도다. 당연히 이들은 한 표를 가진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존댓말로 겸손한 어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강압적인 말하기 스타일이 얼룩처럼 번져 나오기도 한다.

특히 TV 토론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듯한 말이 나오면 흥분해서 제대로 듣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표현대로 '제왕적 정치인' 성향을 드러내는 셈이다. 어떤 후보는 TV 토론에 자신 있다, 혹은 자신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하기도 중요하지만 과연 국민의 소리를 들을 귀가 있는지, 평소에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민주적 자세가 돼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안하무인 식이나,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위험하다. 후보들이 자신을 낮춰 국민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이런 시기, 이런 상황에서조차 강압적 말하기,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이가 권력을 잡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가?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말하기 경연장처럼 국민의 소리 듣기 경연장을 마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간 국회에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보여준 말하기와 듣기 매너는 낙심스럽다 못해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에 달했다. '다 거기서 거기'라는 허무한 양비론이 투표율을 떨어뜨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데 정치인의 수준은 그를 뽑은 국민의 수준이라니, 누워서 침뱉기 같은 판단은 하지 말자.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회의장이나 공식석상에서 말버릇 고약한 국회의원을 국민 수준 저하 책임과 국회 품위 손상죄로 제명하거나 그에 준하는 강한 규칙으로 제어하고 계몽하는 안을 가진 후보가 하나쯤 나왔으면 한다. 그런 안이 신선해 투표율이 올라가는 신나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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