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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받은 뒤 난 너무 지쳐 파괴되고 있는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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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는 지금 너무 지쳐있다. 정말 보통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한 시간 가량 대화에서 이 말을 세 번 반복했다. “스스로 완전히 파괴되고 있다는 느낌이다”고도 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2009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57)를 만났다. 그는 약속 장소인 독일 베를린시 쿠르퓌르스텐담 거리 인근의 ‘문학의 집’ 2층 카페에 약속 시간보다 1분 일찍 나타났다. 검정색 니트 상의와 검정색 바지 차림, 머리 위에 안경을 얹고 있었다. 160㎝가 채 안 되는, 비교적 단신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가에 짙은 화장기가 보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사진부터 찍자고 하자 “사람들의 눈이 많지 않은 곳으로 가자”고 했다. “시선을 받는 게 싫다”고 설명했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자 “이건 인터뷰가 아니라 만남”이라고 대화의 성격을 규정했다. 신상에 관한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이해됐다.

지난해 노벨상 수상작가인 헤르타 뮐러(오른쪽)가 15일 한국을 찾는다. 그가 지난달 31일 독일 베를린에서 서울대 최윤영 교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뮐러는 언론을 피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1월 노벨문학상 수상 뒤 대부분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왔다. 자기 얘기를 직접 한 것은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이 거의 유일하다. 한국 기자와 개별적으로 만난 것도 처음이다. 이날 자리에는 서울대 독문과 최윤영(46) 교수가 함께했다. 뮐러는 주로 독일어로 얘기하다 간간이 영어를 섞었다.

인터뷰를 꺼리는 이유부터 물었다. “나는 연예인이 아니다. 초청을 하는 곳이 너무 많다. 되도록 피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행사도 많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책을 보내며 서평을 부탁한다. 새 작품을 쓰고 싶은데 정말 시간이 없다. 이런 피곤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뮐러는 15일 6박 7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서울 중앙대에서 1주일간 열리는 ‘제19차 국제비교문학회 세계대회’에 참여한다. 42개국 1000여 명이 참석하는 ‘문학올림픽’이다. 그의 방한은 최 교수 등 국내 독문학자들의 설득으로 이뤄졌다. <본지 7월 12일자 27면>

그는 이번 방한에서 두 차례 특강을 할 예정이다. 16일 중앙대에서 ‘마법사, 머리카락, 그리고 왕’을 발표한다. 정치권력과 인권탄압, 자유와 저항, 생존의 문제 등 자전적 얘기를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풀어낼 작정이다. 18일 서울여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선 일상에 스며든 독재자의 만행을 들춰보는 ‘낯선 시선’을 강연한다.

뮐러는 “아시아 여행은 난생 처음”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중국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서른 살 때 동료작가이자 남편이었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독일로 망명했다. 그의 대표적 장편소설 『숨그네』는 옛 소비에트 연방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 소년이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 5월 한국의 문예계간지 ‘문학동네’ 인터뷰에서 “북한은 거대한 강제수용소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조국 루마니아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자신을 억압했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 대한 것이었다. “며칠 전 차우셰스쿠의 무덤이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때 독재자의 시신을 확인하기에 앞서 그로 인해 희생된 6만∼7만 명의 사람들의 유골부터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1989년 시민혁명으로 처형된 차우셰스쿠 전 대통령 부부의 무덤이 가짜라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자 최근 유전자 감식을 위해 무덤 속 유골의 일부를 채취했다.

뮐러는 18일 오후 임진각도 방문한다. 북한에 가까운 곳에 가보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라 한국 측에서 잡은 일정이다. 그는 “너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달라. 그냥 조용한 곳에서 먼 곳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런 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국 작가나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주로 정치적 억압을 소재로 삼은 당신의 작품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과거 한국 군사정부 시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최 교수의 말에 “독재는 몇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겪은 보편적 경험일 것”이라고 답했다.

뮐러의 저작에는 ‘숨그네’(호흡을 의미하는 숨과 놀이기구인 그네의 합성어), ‘기아천사’ 등의 조어가 등장한다. 문학계에서는 그 함축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개인의 상상 속에 답이 있다. 작가는 쓴 것 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카페에 들어섰다. 뮐러는 그를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를린=글·사진 이상언 특파원

◆헤르타 뮐러=1953년 루마니아 내의 독일계 소수민족 거주지에서 태어나 티미쇼아라대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나치 무장친위대에 강제 징집됐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에서 5년간 노역했다. 대학 졸업 뒤 공장에서 루마니아어·독일어 통역사로 일할 때 정보원으로 활동하라는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요구를 거부한 뒤 정보기관의 감시대상이 됐다. 82년 단편 소설집 『저지대』로 문단에 데뷔했다. 87년 독일 망명 때까지 루마니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작가모임에서 활동했다. 독일의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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