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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우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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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우리나라에서 ‘우유 전도사’로도 통한다. 국내의 한 우유회사가 “어떤 사회든 어린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것만큼 훌륭한 투자는 없다”는 그의 말을 광고 카피에 인용한 덕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아이들의 건강 문제에 주목한 처칠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 당시 독일군 폭격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데다 부모와 떨어져 홀로 피란 다니는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쳤다. 그들의 상태가 오죽했을까. 어린이 발육이 국가 미래와 직결된다는 점을 인식한 처칠 내각은 44년 하루 189mL의 우유를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비용이 부담되자 1970년대 초 당시의 교육부 장관 마거릿 대처는 고학년 학생들에 대한 무상 급유(給乳) 지원을 중단했다. ‘복지병’ 치유에 앞장섰던 대처에겐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그래도 5세 미만 아동에 대한 무상 급유는 지방정부를 통해 지원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요즘 영국에서 ‘우유 논쟁’이 뜨겁다. 정부가 내년 4월부터 무상 급유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빈부(貧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어린이에게 주는 우유에 너무 많은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급유 비용은 잉글랜드 지방에서만 한 해 5000만 파운드(약 925억원) 정도다. 큰돈은 아니지만 심각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는 발상이다. 거센 비판에 직면한 캐머런 총리는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다.

우유는 우리나라 40~50대 장년층에게도 향수(鄕愁)를 자극한다. 우유 급식은 70년 9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100㏄ 한 병에 16원씩 내고 사먹는 유상제도로 처음으로 시작됐다.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우유 먹으면 무럭무럭 큰다”는 말에 침을 흘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시대가 변해 지난해 전체 초·중·고생 747만여 명 중 절반가량이 학교에서 우유를 사먹고 있다고 한다.

우유 한 병도 공짜로 주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무상급식이 논란이다. 영국이 ‘겨우’ 925억원 때문에 우유 소동을 벌이는 마당에 수조원의 예산이 들어가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공짜 우유 먹고 자란 세대가 나랏돈이 없어 자식에겐 공짜를 줄 수 없다는 게 오늘의 영국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지만 정말 공짜가 있을까.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