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황준헌(黃遵憲)의 일본국지(日本國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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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일본 민주당의 집권으로 中日관계가 잠시 호전되었다. 당시 하토야마(鳩山)수상의 아시아 중시 발언이 있었고 오자와(小澤) 간사장은 142명의 의원을 대동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시진핑 (習近平)국가부주석의 일본천황 면담등 중일관계는 최고조였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와 간(管) 나오토 수상취임등 소원했던 미일관계가 복원되면서 중일관계는 예전같지 못하다. 양국관계는 여름날 일기처럼 맑았다가도 구름이 끼고 때론 비가 내리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일본은 오랜 교류의 역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중국 일방의 직류였다. 중국의 문화가 물처럼 낮은 곳을 찾아 조선을 거치면서 조선의 문물과 함께 일본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명치유신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문물이 일본으로 들어 왔다. 여기 저기서 흘러 들어온 물은 일본 열도를 적시면서 서로 섞였다. 일본이 부국강병이 되는 것도 이러한 퓨전문화 덕분이다.
日本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해가 뜨는 근본이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 중국에서 부르기 시작한 일본을 “마르코 폴로”가 서양에 알려 지금의 “야판” “재팬”이 되었다. 陳壽의 삼국지중 “魏書東夷傳”에는 倭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중국에서 匈奴가 시끄러운 민족의 대명사라면 倭는 조용하다는 의미가 있다. 기마민족의 흉노와 달리 바다건너 왜는 조용해 보였던 같다. 그후 중국은 倭寇의 노략질과 日本軍의 침략을 받고는 일본이 결코 조용한 민족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중국은 일본을 잘 모르고 있었다. 수많은 東夷족의 하나로 생각했던 일본을 중국에 제대로 소개한 사람은 淸末 초대 주일청국공사 何如璋을 수행한 외교관 黃遵憲이었다. 29세의 황준헌의 눈에 비친 明治 일본은 과거 중국인이 막연히 알던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황준헌은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을 백과사전처럼 정리하여 “日本國志”를 저술했다. 중화민족도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알고 일본을 통해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중국 광동성 客家출신의 황준헌은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朝鮮策略”이 조선의 수신사 金弘集을 감동시킨 것도 그러한 개방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7년에 걸쳐 완성한 “日本國志”는 처음에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이 淸日戰爭에서 패배함으로서 중국내 일본을 다시보는 “일본붐”이 일어났고 일본국지는 滅淸興中을 꿈꾸는 젊은 지사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 책이 있었기에 光緖帝의 무술변법이 가능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에 유학,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아시아의 희망이 되어 줄 것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침략을 자행했다. 抗日에 대한 중국 내쇼날리즘은 중국대륙을 통일하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일본에 대한 중국인의 생각은 반드시 증오만은 아니었다. 전후 일본과 중국은 미중 수교보다 7년 앞서 1972년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당시 다나카(田中)수상의 뚝심과 周恩來총리의 실용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함을써 중일관계는 더욱 강화되어 왔다. 지금 일본은 중국의 제2의 교역상대국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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