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잡스<TWO JOBS>& 포잡스 <FOUR JOBS>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16면

히딩크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한 자리만 보지 마라

넓은 시야를 가지면

곱절의 성취감을 얻는다"

세계적인 저술가이자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 교수는 조직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자기 역할이 분명한 조직, 둘째는 자기 역할이 있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 조직, 셋째는 일의 구분이 없고 필요에 의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조직이다. 지난 여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거스 히딩크라는 명감독의 지도에 따라 드러커 교수가 지적한 이 세가지 유형을 넘나드는 멀티 플레이(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해내는 것)를 성공적으로 펼치며 4강 신화를 일궈냈다. 그러나 멀티 플레이는 축구경기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없이 바쁜 직장생활 가운데 자신의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퇴근 후 두번째 일터로 달려가는 '멀티 플레이족'이 늘고 있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몫.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곱절의 성취감을 얻기 위해 두배 이상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사람들. 낮에는 직장인,밤에는 사장님으로 변신해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생활하는 멀티족의 생활을 들여다봤다.

누가 명함을 달라고 하면 난처해진다. 갖고 다니는 명함이 네개나 되기 때문이다. 본업은 한의사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과 때에 따라 영상출판 사업가, 한방 전문생식 사업체 사장, 중고수입차 판매업자로 바뀐다.

존스미디어는 외국의 우수한 영상물을 국내에 선보이는 사업이다. 올 12월 방학과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 비디오 배급사업을 추진 중이다. 또한 건강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전하기 위해 『대체의학 따라잡기』라는 제목의 책도 출판할 예정이다.

㈜알트메드는 한방전문 맞춤생식 사업체인데 조만간 한의원 전용의 증류약탕기도 선보일 계획이다. 요즘 나는 신제품에 어울리는 멋진 이름을 짓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다.

수입중고차 판매업체인 백두모터스는 본업인 한의원과는 동떨어진 다소 엉뚱한 사업이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나는 자동차 역시 건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운전자의 생명과 직결돼 있으니까. 조만간 유럽의 날렵한 경량 스포츠카를 국내에 선보이려고 한다.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자동차 잡지를 출간하고 정비사업과 부품사업으로 진출하는 것도 모색 중이다.

이 세가지 직업은 내가 한의사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 많은 데다(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다) 진료시간에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사업에 관한 싱싱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게 된다. 사업을 하려면 주어진 환경과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주업무인 한의사와 동시에 멀티 플레이 사업을 하려니 하루에도 몇번씩 아찔한 순간을 겪는다. 가장 어려운 일은 시간관리. 간호사가 "원장님은 급한 볼일이 생겨 두시간 후 쯤 들어오세요"라고 환자에게 말하면 누가 기다리겠는가. 이 자리를 빌려 다소나마 불편을 겪었을 환자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

빠듯한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을 하다보니 안타까울 때가 있다. 때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더 피곤하게 한다. "병원에서 환자 보기 싫어서 다른 일 하잖아, 그렇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맥이 탁 풀린다. 하루종일 일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사업 생각만 하는 나에게 아내는 불만이 많다.

얼마 전엔 집에서 잠시 사업 생각에 몰두하는 사이 세살배기 외동딸이 다리미에 데여 화상을 입은 사건은 두고두고 내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러나 사업을 통해 아름답고 재미난 세상을 만들고 싶은 내 마음을 가족들도 언젠가는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요즘 쑥쑥 커가는 사업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진료가 끝나고 땅거미가 질 때면 나는 설렘을 안고 제2의 일터로 떠난다. 진료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아담한 사무실. 그 곳에서 하얀 가운을 걸치고 환자를 기다리는 한의사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긴장된 얼굴로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는 또 다른 나. 나는 매일 저녁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한다.

권종훈

▶32세▶1994년 동국대 한의과 대학 졸▶97년 특전사 군의관 전역▶98년 동국대 대학원 졸(내과 석사)▶99년 구로구에 가람한의원 개원▶2000년 ㈜존스미디어 설립▶2002년 중고차 매매업체 ㈜백두모터스 공동설립

#난 왜 포잡스가 됐나

"세상을 아름답고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