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둘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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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호 10면

둘째는 1992년 1월에 태어났다. 첫째 때부터 딸을 원했는데 바람과는 달리 아들이었으므로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필사적으로 딸을 희망하고 기도했다. 1992년 1월 23일 아침.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와서 “왕자님입니다”라고 하면서 마치 선물이라도 개봉하는 것처럼 포대기를 펼치던 순간을. 그 순간의 실망을. 그렇게 둘째는 왔다. 첫째가 아닌 둘째로. 딸이 아닌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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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불변의 법칙’의 제1법칙은 “더 좋은 것보다 맨 처음이 낫다”라는 ‘선도자의 법칙’이다. 첫째는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한 선도 브랜드처럼 많은 것을 누린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 앞에는 ‘첫’이라는 ‘감탄사’가 붙는다. 울어도, 웃어도, 몸을 뒤집어도, 네 발로 기어도, 두 발로 일어서도, 옹알거려도 그것은 모두 부모가 처음 겪는 놀랍고 새롭고 신비하고 감동적인 사건이다.둘째는 불리하다. 둘째 자신으로서는 처음 하는 행동들이 이미 첫째가 다 했던 것들의 반복이니까.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부모로서는 이미 첫째 때 보고 듣고 겪었던 일이니까. 물론 둘째도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첫째 때와 같은 감동은 없는 것이다.

둘째에게는 차별화가 필요하다. 첫째와 다른 그 무엇. 만일 둘째가 첫째에 비해 자유롭고 사교적이고 모험심도 강하고 적응력이 뛰어나고 독립적이라면 그것은 둘째라는 불리한 상황을 헤쳐 나오면서 길러진 생존능력인지도 모른다.우리 집 둘째는 자라면서 공부나 예체능 어떤 것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딱 한 번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 학교 이름을 딴 ‘백운 기네스’라는 대회에서 받은 ‘오래 매달리기 상’이다. 그 학교에서 둘째보다 철봉에 더 오래 매달린 학생은 없었다.

고등학교는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로 진학했지만 역시 별다른 특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둘째가 정말 잘하는 걸 발견한 것은 학교에서 백두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백두산 밑 감자농장에서 감자 캐기 실습을 한 것인데 둘째가 가장 잘 캔다고 감독 아저씨가 칭찬하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을 봐왔지만 둘째처럼 감자를 잘 캐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는 것.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둘째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나 감자 캐기를 잘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고 작곡가가 되려고 한다. 지금은 신촌에서 친구와 지내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학원에 다니고 있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둘째를 만나고 왔다. 아내는 둘째를 생각하면 늘 속상하다. 둘째는 음악을 늦게 시작했고 음악에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맘껏 지원해줄 수 있는 부모의 경제력도 없다. 음악을 해서 살아간다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고된 일이리라.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그래서 행복하다면 부모로서도 기쁜 일이 아닐까, 싶다가도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자식의 행복보다 안정적인 삶을 바라게 된다. 자식 앞에서 부모는 속물이다.

그래도 나는 둘째가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그는 자유롭고 독립심 강한 둘째니까. 누구보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끈기가 있고, 감자를 다치지 않게 그러면서도 많이 캐내는 섬세한 감성과 솜씨가 있는 우리 집 둘째니까. 세상의 모든 둘째처럼.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우유부단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라 평한다. 웃음도 눈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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