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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한마디'에 바뀐 것- 어명이 그렇게 무서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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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7월 22일 서울 화곡동 포스코 미소금융센터를 방문해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7월 하순 캐피털 업계는 좌불안석이었다. 익명을 원한 A캐피탈 임원은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발단은 이명박 대통령이 7월 22일 서울 화곡동 포스코 미소금융센터를 방문해 정모(42·여)씨와 나눈 대화였다. 대기업이 경영하는 캐피털사에서 돈을 빌려 연 40~50% 이자를 낸다는 말을 들은 이 대통령은 “사회 정의에 맞지 않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날 캐피털 업계는 실제 금리는 연 30%대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 대통령은 “30%대도 높다”고 일축했다. 금융당국은 곧바로 여신협회에 등록된 37개 캐피털사 가운데 개인신용 대출을 취급하는 14개 회사의 금리 수준과 원가 구조를 점검했다.

캐피털·대부업계·은행 이어
정부 부처도 ‘친서민·친中企’ 정책 쏟아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자 캐피털 업계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나캐피탈은 7월 26일 대출 최고 금리를 연 36%에서 29%로 7%포인트 낮췄다. 다른 경쟁업체도 도미노식으로 대출 금리를 내렸다. 하나캐피탈은 하나금융지주의 관계사인 데다 미소금융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하나금융지주의 김승유 회장이 대통령과 고려대 동문이란 특수 관계 때문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애초 금리 낮출 계획이었다?

하나금융지주 관계자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통령이 고금리 얘기를 꺼낸 지 나흘 만에 금리를 내릴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며 애초 인하 계획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짜 전시용이었다면 대대적으로 홍보했을 텐데 보도자료도 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누가 보더라도 하나캐피탈이 선수를 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하나캐피탈의 ‘파격적’ 금리 인하와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캐피털 업계 1위인 현대캐피탈 역시 8월 1일부터 최고 금리를 연 39.99%에서 34.99%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대출금액의 최고 3.5%인 취급 수수료를 없앨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확정이 아니라 잠정 계획이라고 단서를 달아 정부 움직임에 따라 대응 방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추론을 낳았다. 이 회사가 잠정 계획대로 금리를 낮추면 평균 대출 금리는 연 20%대 중반으로 떨어진다.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정부의 대출금리 인하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려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이 밖에 기업은행의 자회사인 IBK캐피탈 역시 금리 인하 안을 발표하겠다고 밝혔고, 씨티캐피탈과 우리파이낸셜도 금리를 내릴 방침을 세웠다.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금리를 내린 캐피털 업계가 왜 지금까진 서민의 아픔을 모른 척하고 있었을까? 폭리를 취해온 건 아닐까? 또 다른 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캐피털사는 수신 기능이 없어 정부 정책에 따라 대출 금리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는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기 때문에 부실이 생길 가능성이 커 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중간 모집인 수수료, 대손비용을 비롯한 관리 비용도 은행권이나 카드회사보다 많이 든다고 주장했다. 또 출구전략 얘기가 솔솔 나오면서 금리가 들썩이고 있는 마당이라 오히려 금리를 올릴 때라고 강변했다. 그는 “그럼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한 건 캐피털사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금리 인하 움직임은 대부업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7월 21일 정부는 대부업체 금리 상한선을 연 49%에서 44%로 낮췄다. 그러자 대부업계 자산 규모 1위인 러시앤캐시가 8월 1일부터 최고 금리를 연 38%로 낮추겠다고 나섰다. 업계 2위인 산와머니 역시 내년에 최고 금리를 연 36.5%로 내리겠다고 밝혔다. 5월 기준 대부업체의 평균 대출금리는 42%였다. 7월 말에는 시중은행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시중은행은 전국은행연합회와 함께 서민 대출 상품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결국 대통령이 친서민 정책을 강조하자 주로 중산층이나 서민을 대상으로 영업하던 캐피털사와 대부업체는 물론 시중은행까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서민이 오히려 대출 못 받게 될 수도

대통령이 팔을 걷고 나서자 정부 부처도 바빠졌다. 하나캐피탈이 금리를 인하한 7월 26일 금융위원회는 ‘햇살론’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금리가 연 10%대로 신용등급 6등급 이하, 개인소득 연 2000만원 이하인 저소득층이 대출 대상이다.
정부는 앞으로 5년 동안 농협·수협·신협·새마을금고·저축은행 등을 통해 10조원을 빌려줄 방침이다. 햇살론의 등장에 저축은행들도 금리 경쟁에 휘말렸다. 한국·진흥·경기·영남저축은행 등은 연 13.1%로 일괄 적용하던 금리를 29일부터 등급에 따라 11.84∼12.24%로 내렸다. 7월 30일 한 인터넷 언론에서는 지식경제부에서 포스코 관계자를 불러 철강제품 가격 인상 배경을 추궁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나섰다.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7월 29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공정위가 하도급과 관련한 제도 개선안을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납품 가격 연동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는 시그널인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요즘 화두인 대기업·중소기업 간 납품 단가 조정 협의 문제를 다룬다. 원자재 값 인상으로 납품 단가 변동 요인이 있을 때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가격 인상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인데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중소기업계는 줄곧 상대적 약자인 개별 기업을 넘어 소속 협동조합이나 중소기업중앙회, 기업호민관 같은 제3자가 가격 협상을 대신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게 어려우면 원자재 값 변동에 따라 납품 가격을 조정하는 ‘납품 단가 연동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요청해 왔다. 지식경제부와 중소기업청 등은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가격 담합 소지가 있어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공정거래위원회조차 대통령의 ‘중소기업 프렌들리’ 정책에 발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도 친서민·친중소기업 정책을 쏟아냈다. 기획재정부는 서민·중소기업에 적용되는 비과세·감면 제도의 일몰기한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에 질세라 국세청은 세금을 모범적으로 내는 중소기업 세무조사를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쏟아진 친서민·친중소기업 정책에 대해 시장에선 기대보다 우려가 크다. 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금리를 낮추면 회사 수익성이 악화돼 대출 규모가 줄어들 수 있다”며 “그러면 대출 심사가 강화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불법 사금융으로 서민을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금융업계 관계자는 “경쟁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반강제적 서민 정책이 진정으로 서민을 위하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 민간연구원 연구위원은 “억지로 팔을 비틀어 성공한 경제 정책은 이제껏 보지 못했다”며 “현 정권이 무리수를 두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오히려 반기업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 발언에 제2금융권 즉각 대응

하나캐피탈 최고 금리 7%P 인하
현대캐피탈 최고 금리 5%P 인하 계획
한국·진흥·경기·영남저축은행 신용등급 따라 금리 인하
러시앤캐시 최고 금리 연 38%로 인하
산와머니 최고 금리 연 36.5%로 인하(내년)
은행권 서민금융 상품 확대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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