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태권도로 전쟁 상처 치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 정용산 감독(左)이 다낭시 태권도 대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정신통일! 국기 태권도!"

베트남 중부 다낭시 시민회관. 20여명의 베트남인이 서툰 한국말 구령과 함께 하며 태권도 훈련을 하고 있다. 15명은 다낭시 태권도 대표선수이고 나머지는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 제발로 찾아온 10대 학생들이다.

"자세 똑바로 하고 제 자리에 앉아!"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감독의 호령에 훈련생들이 후다닥 제 자리를 찾는다. 훈련생들 사이에 '쓰뜨(사자)'로 통하는 정용산(50)씨. 그는 3년째 다낭시 대표팀을 맡고 있는 한국인 감독이다. 정씨는 훈련생들에게 태권도 뿐만 아니라 한글과 아리랑 등 민요도 가르친다. 모든 교육은 무료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만 이제는 홀가분합니다. 다 태권도 덕분이지요."

정씨는 1975년 초 청룡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쟁은 막바지였지만 산발적인 전투는 끊이지 않았다. 군인.민간인 가릴 것 없이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다낭 사람들은 '따이한'이라면 피하기부터 했다.

2001년 9월 정씨는 다시 다낭을 찾았다. 젊은 시절부터 수련해온 태권도를 다낭에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태권도를 통해서라면 다낭 사람들의 오랜 아픔을 씻을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종전 이후 26년이 지났지만 다낭시에서 '따이한'은 여전히 기피 대상이었다. 그가 사는 동네의 한 70대 노인은 "당장 떠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동네 사람들은 순번을 정해 그를 감시했다.

뿌리깊은 불신은 그가 다낭시 태권도 대표팀을 맡는 것도 가로막았다. 한국인 밑에서 훈련받을 수 없다며 대표 선수들이 전원 불참 선언을 한 것이다. 다낭시의 15개 태권도장 사범들도 선수를 못내주겠다며 버텼다.

그때부터 정씨는 틈나는 대로 이웃이나 선수들을 집으로 초대해 떡.식혜 등 한국 음식을 대접하면서 인심을 얻고자 노력했다. 지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벽돌 격파 등 시범을 보이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뜸.부황 등 한방치료를 해주기도 했다.

그를 대하는 다낭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2003년 6월 그는 드디어 다낭시 대표팀 감독이 됐다. 그러나 그가 맡은 대표팀은 실력도, 정신상태도 엉망이었다. 그해 7월 열린 전국 대회에서 전원 예선탈락했다.

안되겠다 싶었던 정씨는 낯빛을 바꾸고 한국식으로 매섭게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한글부터 가르치고 모든 구령과 대답을 한국어로 하게 했다. 태권도 정신부터 익히라는 뜻이었다. 5분 훈련하고 물 마시기를 되풀이하던 선수들에게 한 시간 훈련하고 5분 쉬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지난해 4월 전국대회에선 팀 창설 이래 최초로 단체 3위에 올랐다. 다낭시 대표팀이 메달을 받는 모습은 TV로 생중계 됐고 정씨는 다낭시의 '스타'가 됐다.

다낭(베트남)=정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