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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8>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3.풍납동 실습발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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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비록 시굴조사이긴 했지만 풍납동 토성 발굴을 통해 실습은 제대로 한 셈이었다. 38년 전인 당시는 변변한 발굴조사 장비 하나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스승인 삼불 김원룡(金元龍) 선생도 둘레가 3㎞가 넘는 넓은 면적 가운데 어디에 시굴 구덩이를 마련할 것인지 고심했다.

토성은 1925년 소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했을 때 크게 피해를 봐 성벽의 서벽과 남벽 일부가 유실된 상태였다. 그래서 시굴조사를 위해 파는 피트(pit), 즉 구덩이는 성벽이 유실되지 않은 성의 북반부를 중심으로 8곳을 정해 파기로 했다. 피트의 크기는 각각 사방 2m 길이였다.

토성 내는 채소밭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우리들이 시굴조사를 하는 중에도 주민들이 성벽을 끼고 새로 벽돌집을 건축하면서 토성벽의 모래를 파내 사용하고 있어서 성벽은 사람들로 인한 '인위적인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학생 신분인 우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성벽을 보존해야 한다는 시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게 된 측면도 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돼 일제시대 지정된 문화 유적을 재지정하면서 풍납동 토성은 사적 제 11호로 지정됐지만 일제가 지정한 범위의 성벽 일부만 포함됐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시굴조사한 위치는 '사적'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시굴은 학생 두명이 한개 팀을 이뤄 4㎡의 땅을 수직으로 파내려 가면서 유물이 발견되는 층에서는 기록과 수습을 병행해 나갔다. 삽질을 처음 시작할 때는 힘껏 잘 퍼냈지만 깊이가 깊어질수록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강행군이 이어진 현장 실습발굴은 1개월 넘게 진행됐다. 학생들은 땅을 파내느라 진을 뺐을 뿐 정작 '땅파는 이유'를 모르다가 실습을 끝내고 나서야 왜 삼불 선생이 풍납토성을 학생들의 실습대상으로 정했는지 알게 됐다. 삼불 선생의 계획은 풍납토성 출토 유물을 근거로 토성이 축조된 연대를 고고학적으로 밝혀보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 우리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李丙燾)선생은 이 풍납토성을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는 사성(蛇城)이라고 고증해 광복 후에도 일반적으로 백제 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李선생은 사성의 우리식 이름은 배암들이성이었는데 배암들이성이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바람들이성으로 음변화가 생겼고, 바람들이의 한자표기가 풍납(風納)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사용돼 오고 있다는 논리를 폈었다.

중요한 건 명칭이 사성이든 풍납이든 축조된 시기를 백제 책계왕(責稽王)때인 서기 286년, 즉 3세기 말로 본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김원룡 선생은 64년 실습 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이병도 선생은 믿지 않았던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풍납토성이 기원 1세기에 처음 축조됐다는 견해를 발표해 기존 학설을 뒤집어 엎는 일대 모험을 했다. 이후 삼불선생의 입장은 백제 건국을 3세기 후반으로 보는 사학계와 크고 작은 논란을 빚었다.

새참으로 먹었던 '꿀맛 막걸리'에 이어 추어탕에 얽힌 에피소드도 돌이켜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작업이 힘들어서였는지 하루는 고향에서 먹던 추어탕 생각이 났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몰래 작업현장 부근의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은 광진교(광장교·廣壯橋) 근처에 있던 경기도 광주행 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에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 추어탕을 주문해 놓고 잠시 고향생각에 잠겼다. 대학생활 3년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고 고향의 부모님 생각도 났다. 잠시 후 기다렸던 추어탕 뚝배기가 놓여졌다. 그런데 웬걸, 기겁할 일이 벌어졌다. 한 숟갈 뜨기 위해 숟가락을 넣었더니 추어탕 뚝배기 속에서 미꾸라지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물론 미꾸라지가 살아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추어탕의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째로 내는 것을 몰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고향의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뼈까지 갈아 탕을 만드는데, 그런 요리 방식의 차이가 불러온 해프닝이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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