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핵파문]美 핵폐기 요구에 北 엇박자 합의 파기 불씨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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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는 미국에서 제네바 합의 파기론이 쏟아져나오자 적잖게 당황해하면서 진의파악에 분주한 분위기다.

19일 방한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미국은 이 합의에 대해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공식 통보했는데도 파기 결정론이 끊이질 않는데다, 이 합의 파기가 몰고올 파장 때문이다.

정부는 일단 미국의 공식 입장은 "파기가 아니다"고 강조한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20일 "무효화" 발언도 파기 쪽에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고 본다.

파월의 발언은 "북한이 무효화한다고 했으니 무효화된 것"으로 파기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21일 외교 경로를 통해 다시 미국으로부터 "파기가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정부가 제네바 합의 유지를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제네바 합의 이행에 관한 북·미 양측의 입장이 계속 엇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평양방송은 21일 이 합의의 이행을 강조했지만 경수로 공급 지연에 따른 전력보상이 우선이라는 기존입장을 되풀이했다.

미국이 요구 중인 핵개발 시설 폐기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정부는 북한이 이 시설 폐기에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미국이 합의 파기 카드를 빼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현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이 이 합의의 유효성에 의문을 표시해온 점도 변수다.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과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이 합의는 북한의 과거 핵동결을 위해선 필요하겠지만 새 핵개발을 막는 틀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지론을 펴왔다.

부시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인 두 사람의 이런 입장이 제네바 합의의 장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합의 유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합의가 파기되면 북·미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북·미 모두 초강수로 나와 한반도 정세가 급격히 악화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북 경수로 사업 당사국인 일본도 이해를 같이한다.

일본은 이 합의가 깨지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고,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북·일 수교협상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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