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면 은행답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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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셰익스피어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두 가지 실수 때문에 몰락한다. 첫째 외압에 굴해 초지일관하지 못했고, 둘째 금융인(고리대금업자)답게 행동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위장판사의 위협에 물러서지 않고 이판사판의 각오로 안토니오의 심장부위 살점 1파운드를 잘라내겠다고 끝까지 버텼다면 스토리는 다시 반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실수는 금융업을 한다는 사람이 냉정함을 잃고 감정의 지배에 따라 행동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원리금만 제대로 챙기면 될 일을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에 이자는 안받는 대신 제때에 돈을 못갚으면 살을 1파운드 떼내겠다는 식의 계약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런 위험한 짓은 결국 패가망신을 불러왔다.

반면에 1998년 1월 한국 정부와 외채협상을 벌였던 해외 채권은행들은 샤일록보다 훨씬 프로다운 처신을 했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외환위기라는 덫에서 허우적대는 한국에 대해 우선 원금이나 이자의 감면 같은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못을 박았다. 다음으로 민간이 빌린 돈의 상환기간을 연장해 주는 대신 정부 보증을 요구해 위험을 크게 줄였다. 게다가 이율은 국제금리(리보)에 2.25∼2.75%포인트를 덧붙여 받는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끝냈다.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약속한 데다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는 판인데도 이만한 금리를 뜯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역시 이들이 동정심이나 자비심 따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금융인답게 냉철한 계산과 전략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얻은 성과일 것이다. 이야말로 바로 선진금융기법(?)의 진수가 아니겠는가.

이에 비해 최근 우리 은행들의 행태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은행들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위험을 최대한 줄이고 수입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금융업의 기본원칙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때문이다.

산업은행의 현대상선에 대한 거액대출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은행장도 모르게 4천9백억원이 지원된 이유가 무엇인가? 전직 총재들의 말은 왜 엇갈리는가? 지난해 5천여억원이 추가대출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반 금융관행에 어긋나는 일들이 벌어지다 보니 금융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국민도 의혹의 눈길을 줄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정부 압력 때문에 대북 지원과 연계된 비밀대출이 있었다면 이는 정말 은행답지 못한 처신이었다고 할 것이다.

급증세의 가계대출, 그리고 이에 따른 위험과 관련해서도 은행들은 반성해야 한다. 은행들의 개인대출 세일은 계속되고 있다. 용도에 관계없이 아파트만 있으면 거금을 빌려 주었고 주택 구입비의 대부분을 대출해 주면서 부동산 열기를 부채질해 왔다. 가계대출은 지난 9월 말 이미 2백조원을 넘어섰다. 은행들은 담보가 있으니 걱정없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다면 또 다시 외환위기 때의 흉한 모습으로 되돌아 갈 공산이 크다.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경계신호가 신용불량자의 양산 사태다. 대책으로 개인워크아웃 제도가 도입돼 이달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은행이 발벗고 나선다는 점부터가 문제일 수 있고, 실효성 또한 의문시된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어떻게 막을 것이며 농가부채 문제는 또 어떻게 처리하려는지도 걱정된다. 상환기간 연기나 원금 및 이자의 감면같이 고상한(?) 일은 은행이 앞장설 게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관이 맡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환란 이후 우리는 은행들을 살리고 신인도를 회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과 뼈빠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은행들은 은행답게 외압이나 시류나 감정에 흔들림 없이 보수적인 자세로 제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으로 국민에게 보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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