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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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곳은 지금 '통일된 한국'이다. 남(南)이고 북(北)이고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가 돼 있다. 남쪽 선수가 나와도, 북쪽 선수가 나와도 똑같이 응원하고 똑같이 박수를 친다. 모든 쇠를 다 녹이는 용광로이며 맛있는 비빔밥이다.

지금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은 축구도 야구도 아닌 유도다. 유도경기가 벌어지는 구덕실내체육관은 연일 만원사례고 표를 못 구한 사람들은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북한 응원단이 오기 때문이다(물론 경기는 뒷전이고 잿밥에만 관심있는 사람들도 많다). 북한이 미녀들만 뽑아서 응원단을 보낸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남북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4개의 금메달을 한국과 북한이 모두 가져간 2일 유도장은 완전히 잔칫집이었다. 북한 응원단이건 한국 응원단이건 양쪽 매트에서 한국과 북한선수들이 잇따른 승전보를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열광했다. 어느 새 북한 응원단 입에서도 거침없이 한국선수들 이름이 불리면서 "우리 선수 잘한다"는 응원소리가 터져나왔다.

우리 선수? 그랬다. 분명히 그 자리에는 '남조선 선수'나 '북한 선수'가 없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우리 선수'였다. 유도장뿐이 아니다. 역도장에서, 레슬링장에서, 축구장에서 북한선수를 보면서 '우리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관중은 거의 없다.

북한 선수들은 마치 홈경기를 하는 듯한 착각을 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들의 표정에서 이렇게 열광적으로 응원을 받을 줄 미처 몰랐다는 놀라움을 읽을 수 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같은 민족이 응원해 주니 힘이 더 났다"고 말한다.

부산시민들의 반응도 의외다. 북한 선수나 응원단을 보는 눈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형제를 보듯이, 친한 친구를 보듯이 즐거운 표정이다. 손 한번 잡아보려고 경쟁적으로 손을 내밀기도 한다.

북측 사람들도 많이 변했다. 2년 전 시드니올림픽에서 보던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예상치 못했던 환대에 감정이 격해진 탓도 있겠지만 거리낌이 없다. 한국 응원단을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하는가 하면 취재진에게 농담도 건다.

그런데 여기에도 커다란 '장벽'이 있다. 이름하여 '안전통제본부'. 국정원 직원들과 경찰들로 구성된 안전통제요원들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북한 응원단이 앉아있는 자리 옆에는 아예 한 블록을 모두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차지하고 앉아 있다. 유도장에는 'ㄷ'자로 응원단을 포위하고 있다. 일반인은 물론 취재진의 접근을 원천 봉쇄한다. 고개를 들이밀고 몇마디 물어보려는 기자들을 자꾸 뒤에서 잡아다니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오히려 북측 사람들은 말을 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의 '통제요원'들이 막고 나선다. 이들의 통제방법은 '타이트 맨투맨'이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데도 따라 다닌다. 총련계 신문인 조선신보 기자들에게도 한명씩 따라붙고 숙소 입구도 지킨다.

북한 선수단 입에서 "여기에서는 행동의 자유가 없다"는 말이 튀어 나온다. 세상에나. 그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해왔던 말이 아닌가.

통제는 자신감과 반비례한다. 자신이 없을수록 통제를 강화하게 마련이다. 사실 현장에 나와 있는 요원들이야 상부 지시에 충실하게 따를 뿐이다. 그렇다면 통제를 강화하라고 시킨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들은 그것을 '안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통제'로 비칠 뿐이다.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형성된 좋은 분위기가 계속 통일의 길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inhe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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