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무시한 변칙 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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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그룹의 비밀 대북지원 의혹에 대해 당시 청와대·정부의 고위 당국자들과 산업은행 관계자들의 발언이 엇갈리고 있다.

당국자들은 "나는 관련되지 않았다"며 일제히 부인했으나 금융계 인사들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다"고 밝혔다.

◇정철조 대우증권 회장(당시 산업은행 부총재)=장기 운영자금이나 시설자금과 달리 초단기의 당좌대월(마이너스 대출 통장처럼 언제든지 빼 쓸 수 있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부총재가 위원장인 신용위원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돼 있다.

당시 산은의 조직체계상 5대 그룹 이상 대기업에 대한 당좌대월은 박상배 여신본부장(현 산은 부총재)의 전결 사항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만한 규모라면 총재(이근영 현 금감위원장)에게 직보했을 것이다. 현대상선에 4천억원의 당좌대월이 나갔다는 소문조차 은행 내부에서 못 들었을 정도로 컨피덴셜(극비사항)이었던 것 같다. 당좌대월은 통상 30일 이내에 갚아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갚지 않도록 채권자인 산은이 허용했다면 '변칙 지원'이란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이용근 당시 금감위원장=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산업은행을 통한 지원 요청이 금감위에 온 적조차 없다. 나중에 그런 얘기를 사석에서 전해들은 바는 있다. 당시 나는 금감위원장으로 현대그룹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만일 그런 지원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면 (못하도록) 막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왕자의 난'이다, 뭐다 하며 구조조정을 꺼리던 현대에 그런 지원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정부의 구조조정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이기호 청와대 특보(당시 경제수석)=당시 경제부처 장관들과 산은 총재 등이 참가하는 경제대책 회의는 여러 차례 열린 적이 있다. 그러나 현대상선의 유동성 문제나 산업은행의 대출금 회수 능력에 관한 대책회의를 한 적은 없다.

다만 2000년 8월께 다른 문제를 논의하던 회의 말미에 배석했던 엄낙용 당시 산은 총재가 일어나면서 "현대상선 대출금의 회수가 어려운 게 아니냐"고 말했던 것은 기억난다. 이는 그러나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이 가능한지를 물어온 것이 아니라 회수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함께 참석했던 금감위 관계자의 의견을 들어본 뒤 "원칙대로 회수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밝혔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어떤 대출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었다.

◇임동원 외교안보통일 특보(당시 국정원장)=김보현 국정원 3차장과 엄낙용 전 산은총재가 현대상선 대출 건과 관련해 만났다는 엄호성 의원의 주장은 금시초문이다. 현대와 산업은행, 북한 간의 문제가 아니겠느냐.

◇박지원 청와대비서실장(당시 문화부장관)=산업은행과 현대상선·금감위가 이미 다 해명하지 않았느냐. 한나라당은 무슨 일만 생기면 무조건 청와대를 들고 나선다.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산업은행에 내가 대출 압력을 행사했다'는 엄호성 의원의 주장은 사실무근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당시 대북사업과 관련해 산업은행을 비롯한 어느 은행에도 전화를 하거나 압력을 넣은 사실이 없다.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전혀 들은 적 없는 얘기다. 금융지원 문제는 통일부가 간여할 게 아니다.

◇엄낙용 당시 산은총재=김충식 당시 현대상선 사장으로부터 "현대상선이 쓴 돈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갚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와대에서 이기호·진념·이근영씨도 만났다. 국정원장 면담을 요청했는데 김보현 3차장을 만났고, 金차장은 걱정말라고 했다. 내가 (여덟달 만에) 경질된 이유는 통보받지 못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청와대 모임은 정확한 기억이 없다. 산은이 현대상선에 돈을 빌려준 것은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헌재 당시 재경부장관=재경부와는 일절 논의가 없었다. 당시 경제 부처들은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에 주력했을 뿐 대북사업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대출은 6월에 이뤄지고 나는 8월에 재경부 장관에 부임해 대출 과정을 잘 모른다.

경제부·정치부

econo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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