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北·日접근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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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17일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간의 현안에 관해 폭넓은 의견교환을 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국토가 분단돼 냉전체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곳은 한반도밖에 없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북한은 분명 우리의 가상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남북한 간의 화해·교류·협력 무드 조성의 물결 속에서 북한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외교안보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한편 일본은 분명 미국과 더불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전통 우방 중의 하나다. 한·일 우호협력 관계의 유지는 우리의 국가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번의 고이즈미-김정일 회담에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가상적이었던 북한과 우리의 최우방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만남이 남북한 관계는 물론 한·일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과 북한 정상의 만남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국제정치질서를 변용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우리의 외교안보정책의 수정과 재편성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개최된 일본-북한 간의 정상회담은 북한과 일본의 최고통치권자가 전후(戰後) 사상 최초로 만난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게 되는 정치·외교적 성과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국교도 없는 일본의 총리가 평양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일본이 강조하는 '전후 종식'의 관점에서 볼 때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앞으로 일본과 북한 간의 접촉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양국은 연내 국교정상화를 목표로 해 이미 실무적 수준에서 접촉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점에 관련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의 정상회담 이후 양국 간의 모든 외교적 접촉사항에 관해 일본은 우방인 한국 정부와 긴밀한 외교적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사전협의(Prior Consultation)를 해야 한다.

둘째, 향후 일본과 북한 간의 긴밀한 외교적 접촉과 관계개선,나아가 양국 간의 국교 정상화가 한·일 우호관계를 저해하거나 남북한 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돼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일본과 북한 간의 접근 속도는 남북한 관계의 발전 속도와 정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예상되는 미국과 북한 간의 관계개선 역시 남북한 관계의 발전 속도와 정비례해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과 미국의 과도하고도 일방적인 북한 접근은 자칫 남북한 관계를 불편하게 할 요인을 적지 않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본은 종래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남한 정책과 북한 정책을 추구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일본은 남한에 대해서는 북한 카드를 제시하는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남한 카드를 제시하면서 그들의 국가이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한반도 정책을 추구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일본 정부의 운신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현재 전개되고 있는 북한과 일본 간의 접촉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의 구한말 외교사를 방불하게 한다. 1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일본·중국·러시아는 여전히 한반도 국제정치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4강과의 관계를 한국 외교의 축으로 간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한반도의 신국제정치질서에 대비해 유효 적절한 외교안보정책의 궤도수정을 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한말 당시 주일 청국공사관의 황준헌 참사관이 '친청연일결미(親淸連日結美)'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조선책략(朝鮮策略)』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커다란 의미를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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