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의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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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헤어 스프레이 데이'.우리말로는 '머리칼 휘날리는 날' 정도로 이해하자.6년 전 미국의 선빔이라는 회사에서 나돌던 은어다. 감량(減量)목표 달성에 실패했다고 보고하는 날은 사장이 머리칼이 휘날릴 정도로 고래고래 야단을 치는 바람에 혼비백산한다는 뜻이다. 이 CEO는 별명이 '전기톱(chainsaw)'인 알버트 던랩. 1990년대에 '구조조정의 귀재'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웨스트포인트를 나와 베트남전에 공수부대로 참전했던 던랩은 90년대까지 몇몇 부실기업을 흑자전환시키면서 스타가 됐다. 제지업체 스코트사에서는 CEO 재직 18개월 만에 주가를 2백25%나 끌어올린 후 킴벌리 클락과 합병시키면서 1억달러의 보너스를 챙겼다. 96년 7월 던랩이 부실 가전업체인 선빔의 경영을 맡자마자 선빔의 주가가 60% 치솟았을 정도.

던랩은 특히 톱질하듯 무자비하게 감원을 한다 해서 '전기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코트에서는 1만1천명을, 선빔에서는 종업원의 절반을 잘랐다. 저서 『기업수술(Mean Business)』에서 던랩은 "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주주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며, 이를 위해 어떤 희생도 무릅써야 한다"고 외쳤다. 이 책의 한글 번역판(『던랩의 기업수술』)은 일부 학교와 기업에서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던랩 경영의 실체는 딴판이었다.저널리스트 존 번이 쓴 『전기톱의 악명』에 따르면 던랩은 감량을 내세워 선빔의 전산파트 직원을 전원 해고하고 아웃소싱 했는데, 종전에 연봉 3만5천달러 직원이 처리하던 일을 연봉 12만5천달러짜리 외부 용역직원에게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 패착(敗着)은 '밀어내기 매출'을 동원한 장부조작이었다. 돈은 나중에 받는 조건으로 왕창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마구 실어내고는 대규모 흑자를 낸 것으로 발표했다가 들통나 2년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지난주 외신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던랩에게 선빔의 회계장부 조작 혐의로 벌금 50만달러를 부과했다고 보도했다. 던랩은 앞으로 상장기업의 임원을 맡지 못한다는 중징계까지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귀재도, 영웅도 아니다. 존 번은 던랩을 '오직 감량만을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인 자질부족형 경영인'으로 묘사했다.'전기톱'의 실패가 드러난 지금도 던랩의 『기업수술』을 탐독하는 사람들은 없는지 궁금하다.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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