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가 본 달라진 세계 달라진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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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美, 反테러 명분 일방주의 치달아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클린턴 정부의 노동장관을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부시 정부가 보수에서 중도로 노선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적인 미국인들에게는 불길한 예언이었다. 전국 투표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보다 33만표를 적게 얻고 대통령이 된 부시는 "클린턴 없는 클린턴 정부"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부시의 정책노선이 보수에서 중도로 이동하면 시장경제와 경쟁제일주의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수정하고 서민을 위한 사회보장지출을 싫어도 늘려야 한다. 부유층과 대기업에 혜택을 주는 세금정책과 환경정책도 수행할 수 없다. 국제적으로는 클린턴의 파트너십 외교를 계승해야 한다.

9·11 테러가 이런 우울한 전망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리더십 없는 약체 대통령일 것이라던 부시는 미국 역사상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제외하고는 의회와 군대와 여론을 가장 강력하게 장악한 대통령이 됐다. 그에 대한 지지율은 91%로 루스벨트의 93%보다 낮지만 걸프전쟁 때 그의 아버지의 84%, 베트남전쟁 때 린든 존슨과 리처드 닉슨의 평균 지지율 61%를 뛰어넘는 인기다.

테러 이후 미국사회에는 애국주의와 전쟁심리(Jingoism)가 팽배했다. 탈레반 포로들이 학대를 받고 아랍계 미국인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대통령이 의회의 권능을 무시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그래도 그것을 진지하게 문제삼는 여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회는 테러 복구기금 4백억달러와 낮은 금리의 전시(戰時)국채발행을 두말없이 승인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국내판 단독주의가 등장했다.

국제정치에서도 즉각 '미국 뒤에 줄서기' 바람이 불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테러 공격 직후 제일 먼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테러응징에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미군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의 군사기지를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중앙아시아가 어떤 지역인가. 전세계 석유생산의 3분의2를 차지하는 중동의 걸프 연안국들은 세계경제를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하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은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와 가스 자원에 주목했다. 9·11 테러는 고맙게도 미국에 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제르바이잔의 유전지대에 교두보를 만들어 주고 중앙아시아의 심장부에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필요하면 중국을 배후에서 압박하는 발판을 얻은 것이다.

유럽공동체가 테러응징에 참가하고, 독일과 일본은 물실호기(勿失好機)라고 반세기의 평화주의와 결별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군대를 보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예상보다 쉽게 끝나 부시의 단독주의 외교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부시는 세계를 향해 "결정은 미국이 한다. 미국을 따르든지 미국의 적이 되라"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 같은 카우보이 영웅을 닮아갔다.

미국의 전략개념도 방어에서 선제공격으로 바뀌었다. 핵을 갖지 않은 나라에는 핵공격, 특히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정책까지 포기했다.중동에서는 이미 친이스라엘적인 정책을 더욱 친이스라엘로 바꿔 아라파트 제거를 압박한다. 북한정책도 한국의 안보상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는 강경노선을 고집한다. 부시의 단독주의가 이라크전선에서 제동이 걸린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그는 후세인 제거로 테러와의 전쟁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초를 세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영국·프랑스·독일·일본이 반대한다. 유엔 안보리의 위임을 이라크공격의 조건으로 요구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대는 미국·사우디 관계를 위기로 몰아간다.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생각하면 그것은 심각한 사태다.

이슬람 세계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20세 전후의 젊은 세대는 미국 증오의 교육을 받고 자란다. 그래서 그들은 시한폭탄이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알 카에다 및 탈레반 소탕과 후세인 제거는 필요한 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나라만들기와 경제일으키기를 지원하는 국제연대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국제연대 못지않게 중요하다.

9·11 테러가 가져 온 지각변동은 국제질서를 위해서 불행한 변화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부시 하기에 달렸다. 부시는 자신이 단독주의에 너무 도취되면 좋은 의도로 출발한 국제연대가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는 국제연대로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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