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유럽 은행 91곳 중 7곳만 불합격 … 변죽만 울린 ‘스트레스 테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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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란 게 너무 어려워도, 너무 쉬워도 안 되는 법이다. 변별력이 낮아져 본래 목적인 옥석 가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유럽 은행들이 치른 ‘스트레스 테스트’(재무 건전성 평가)를 놓고도 이런 우려가 나온다. 예상보다 좋은 성적이 나왔지만, 시장에선 환호성이 터지지 않는다. 은행들의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 출제자가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너무 쉬웠다는 얘기다.

유럽 은행감독위원회(CEBS)는 23일(현지시간) 역내 91개 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7개 은행이 기준을 맞추지 못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84곳은 앞으로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는 얘기다.

불합격한 곳은 독일의 히포리얼에스테이트(HRE)와 그리스 농업은행, 스페인 저축은행 5곳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곳들인 데다 시장에선 이미 ‘문제아’로 찍혀 있었던 곳이다. HRE와 그리스 농업은행은 이미 국유화돼 있다. 이들 은행의 자본 확충에 필요한 금액도 45억 달러 수준에 그친다. 골드먼삭스는 CEBS의 발표 이전에 불합격 은행이 10곳에 이르고, 자본 확충에 필요한 돈이 49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역내 은행의 충격에 대한 회복력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날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0.99% 상승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결과 발표 직후 하락세를 타다 막판에 살짝 반등했다.

시장의 반응이 무덤덤한 건 테스트의 기준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탓이다. CEBS는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테스트를 진행했다. 유럽 경제가 완만하게 회복할 때, 그리고 경기가 다시 고꾸라질 때(더블딥)다. 여기에 재정 불안으로 국채 값이 급락하는 상황을 덧붙였다. 그리고 최악의 조건에서도 위험자산 대비 은행의 기본자본(Tier1) 비율이 6%를 넘길 수 있는지를 통과 기준으로 삼았다. CEBS는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20년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장의 시각은 다르다. 미국 포렉스닷컴의 외환분석가 브라이언 돌란은 “테스트에서 가정한 시나리오가 충분히 엄격하지 않아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게 금융시장의 화약고로 불리는 남유럽 국채다. CEBS는 이번 평가에 그리스 등이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을 하는 상황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대신 만기 보유가 아닌 거래 목적으로 은행이 들고 있는 국채만 대상으로 대손상각을 하는 경우를 가정했다.

하지만 은행이 지닌 국채의 90%는 보유 목적으로 분류돼 있고, 디폴트가 발생할 경우 이도 상각 대상에 잡힌다. 결과적으로 이번 평가는 유럽 은행들이 보유한 국채의 잠재 위험을 낮게 반영한 셈이다. JP모건의 경제분석가 데이비드 매키는 “유럽 은행들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려면 국채에 대한 스트레스가 풀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은 이번 평가가 국내 금융시장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25일 밝혔다. 합격하지 못한 7개 은행이 국내 금융회사에 빌려준 돈은 한 푼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내 금융회사가 이들에 투자한 금액도 5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투자 대상 역시 담보자산이 있는 채권(커버드 본드)이라 손실 가능성은 낮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김원배·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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