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의 '현재진행형' 원로작가 유영국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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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유영국(劉永國·86)씨는 한국 화단이 낳은 '추상미술의 거목'으로 평가받아온 원로화가다. 말을 아끼고 유별나게 금욕적이었던 그가 우리에게 허튼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의 작품세계는 여전히 낯설게 남아 있다. 그에게는 동시대 화가들인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과 같은 신화가 없기 때문이다. 문학성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직업화가로서 고집스럽게 작업실에만 묻혀 우리에겐 작품만을 던져놓은 이 노화가를 찾아가는 길은, 곧 이 땅에서 서구 근대의 '미술' 개념이 어떻게 성립 가능했는가를 추적하는 일이 된다.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기원과 정점'은 '추상'이라는 형식적 외피 속에 갇혀 있던 이 화가의 내면을 읽어 우리 삶의 전개를 더듬는 기획전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에 걸쳐 있는 미공개작들은 한국 추상회화의 성립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가 일본에서 발표했던 30년대의 릴리프(부조) 작품 3점을 복원해 선보이며, 30~40년대 절대추상작 17점이 원작 2점을 포함해 복원작 7점과 사진자료 8점으로 되살아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방 이전 작품수가 1백70여 점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 20여 점의 발굴은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기하학적인 엄격한 조형성, 나이프로 두텁고 균질하게 바른 강렬한 색면들, 그 속에서 우람하고 굳건하게 솟은 '산'의 모티브는 오랫동안 유영국 작품세계의 상징처럼 이야기돼 왔다. 곁가지와 수사학을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화면은 작가의 침묵 속에 보는 이를 그 산 너머 절대적인 추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유영국과 초기 추상'이란 책을 냈던 이인범(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위원)씨는 "유씨는 30년대 후반 사실적인 화풍이나 인상파류의 향토적 색채를 지향하는 미술이 기존의 식민지 화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며 추상미술을 하나의 대안운동으로 전개해 갔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초기 추상을 단순히 서구 양식의 재빠른 베끼기나 형식주의적 모방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체제의 국제 정치학적 역학 관계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김환기가 회화의 원천을 문학적 서사와 민족문화의 전통에서 가져온 반면 유영국은 문학성 같은 미술 외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통해 근대적 시각성에 입각한 추상을 수립하고자 노력해왔다"고 평가했다.

전시와 함께 9월 14일 오후 2시 가나아트센터 아카데미홀에서 열리는 세미나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 해석의 쟁점'도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인범 연구위원과 미술평론가 김윤수씨가 발표하고, 화가 김병기씨와 미술평론가 이구열씨가 증언할 이 자리는 특히 이인범씨가 기획한 '증언 프로젝트'가 눈길을 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대척점으로 추상을 거부해야 했던 김윤수씨, 유영국씨와 '문화학원' 동창으로 화단과 유씨의 작품세계를 지켜봐온 김병기씨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 있는 한국 현대미술사 속에서 유영국의 추상미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모색하기 때문이다. 02-720-102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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