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등에 탄 북한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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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조(南北朝)시대 말엽, 북조에는 양견(楊堅)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선제(宣帝)밑에서 외척으로 재상에 올랐지만,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한족천하를 세우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드디어 581년 선제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입궐해 궁중모반을 꾀하였다. 이때 아내 독고부인이 긴한 전갈을 보낸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는 없습니다(騎虎之勢 不得下). 이제 호랑이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시오소서." 용기를 얻은 그는 선제의 뒤를 이은 어린 정제(靜帝)를 폐하고, 스스로 수(隋)나라의 문제(文帝)로 등극했다. 그 후 8년, 갈라진 남북조를 통일하는 위업도 달성했다.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는 곡예에서 성공한 셈이다.

과연 한반도의 남북조 시대에는 언제쯤 이런 변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 결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이 최근 '호랑이 등으로 갈아타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급'하는 사회주의 대원칙을 '보상에 따라 일하고, 가격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개인경작지를 4백평으로 확대하고, 제한적이지만 기업의 자율권도 부여했다. 무상배급을 직접구입으로 바꾸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생필품 가격의 인상은 가히 혁명적이다. 평균 30배를 올리고, ㎏당 8전 하던 쌀은 무려 5백50배나 올렸다. 환율은 1백배, 임금도 25배를 올려 현실화했다.

아무리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사회주의 강국'을 위해 '인민의 요구와 의사를 반영한 독창적인 제시'라지만, 이것은 획기적인 개혁조치가 아닐 수 없다. 가격과 시장 기능을 도입해 사회주의의 한 축을 크게 흔들어 놓고 있다. 느린 횡보에서 갑자기 호랑이 등으로 갈아타는 모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면적인 시장경제의 도입은 아니다. 자율적인 가격변동을 허용하지 않고, 인상된 가격을 배급기준으로만 활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제개혁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정책변화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조치의 파장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당'을 위해 '능력에 따라 일해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뿌리째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장사꾼'과 '농장원'이 모두 시장의 묘약인 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악령'을 불러들인 것이다. 한번 화폐에 사로잡힌 마음은 쉽게 되돌려 놓을 수 없다. 호랑이를 타고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암시장이 위축되고, 생산과 공급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벌써부터 '일을 해야 먹고 산다'는 바람이 분다고 하지 않는가. 더 많은 보상을 위해 열심히 뛰면 당연히 식량증산에 보탬이 된다. 그러나 덩샤오핑(鄧小平)이 "시장만이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하이에크의 권고를 받아들였던 중국과는 다르다. 농업기반이 취약해 제한적인 시장 유인만으로는 당장 식량자급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제조업부문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가격 현실화만으로는 자립경제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머지않아 물자부족과 인플레이션이 재연되는 '부족의 경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물가만 수십배 올려놓고 수급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암시장과 부패는 더욱 만연하고 화폐거래가 배급제를 마비시키게 된다. 인민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탈북 행렬은 더 길어질 것만 같다.

북한이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충분한 물량으로 가격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수혈하든가, 더 과감한 시장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남북협상과 대외관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성공해도 '우리식 사회주의'는 더욱 더 시장경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누룩과 같은 '시장의 악령'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북한도 시장과 인터넷, 세계화의 덫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호랑이는 시장을 향해 거칠게 달릴 뿐이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의 남북조 시대도 머지않아 시장으로 통합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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