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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27회-1.불패신화현대의좌절>속 곪은 현대, 對北사업 핑계대며 "돈 달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올 10월이 가기 전에 금강산 유람선 관광사업을 시작하기로 북한 측과 합의했습니다."

1998년 6월 23일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

정몽헌 현대그룹 협의회 공동회장이 회장 취임 이후 6개월 만에 첫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1주일 전인 6월 16일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5백1마리의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그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는 곧 정몽헌이 정주영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힌다는 의미였다. 대북사업은 정주영 평생의 숙원사업이었던 만큼 이를 물려받는 이가 곧 현대그룹의 대통을 잇게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89년부터 정주영이 추진해오던 대북사업에 먼저 뛰어든 것은 정몽구 회장이었다. 정몽구는 현대정공이 96년 중국 옌볜(延邊)에 설립한 기차 공장을 발판으로 베이징의 북측 라인과 꾸준히 접촉해 왔다. 그러나 당시 정몽구의 대북사업은 번번이 YS 정부의 제동에 걸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틈새를 파고 든 것이 바로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과 김윤규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이었다. 정몽헌의 '대북사업 2인방'이었던 두 사람은 정주영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가신(家臣)이었다.

이익치는 YS 정부의 서슬이 무디어진 97년 9월 현대증권 박정두 고문을 통해 일본 규슈 국제대학의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二)교수를 움직인다. 고바야시는 YS정권 시절 일본 아사히 신문의 서울 지국장을 하면서 YS는 물론 북한의 대남 공작 책임자였던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과 각별한 친분을 맺은 인물이었다. 박정두는 YS와 경남중학교 동창으로 고바야시가 YS와 인터뷰할 때 통역을 맡았던 인연으로 고바야시와 막역한 사이가 됐다.

고바야시는 현대가 대북 교섭의 전권을 준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익치는 즉각 자신이 서명한 위임장을 고바야시에게 보냈다.

고바야시의 회고.

"현대 측은 만의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그룹 총수 대신 이익치 회장이 사인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정주영 회장의 결단력과 금강산 개발에 대한 열의를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대북 접촉의 중재역을 수락했다."

고바야시는 신일본 산업의 요시다 다케시(吉田孟) 사장을 동원했다. 요시다는 부친이 북한 사람이고 모친이 일본 사람인 조총련계 간부로 북한을 무시로 오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마침내 현대와 아태평화위는 98년 2월 3일 싱가포르에서 첫 대면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날 약속은 이틀 전 돌연 취소된다.

다시 고바야시의 회고.

"싱가포르로 가기 위해 호텔과 비행편을 다 잡아 놓고 막 떠나려던 참에 정몽헌 회장 측으로부터 회담이 취소됐다는 통보가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몽헌 회장이 대북 접촉을 시도하자 몽구 회장 측에서 북측에 연락해 견제에 나섰고, 북측이 몽구 회장과의 기존 관계를 감안해 회의를 취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혼선은 이내 정리됐다. 정주영이 즉각 교통정리에 나서 대북 접촉 창구를 정몽헌으로 단일화한 것이었다.

결국 정몽헌은 2월 15일 베이징에서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만나 정주영 회장의 1차 소떼 방북을 이끌어 냈다.

소떼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으로 간다는 아이디어는 정주영 회장이 냈다. 당초 북한은 남한 측 인사가 판문점을 통과해 방북하는 것을 꺼렸다. 특히 북한 군부의 입장은 강경했다. 이런 분위기를 한번에 바꾼 것이 바로 소떼 방북이었다.

김윤규 당시 현대건설 사장(현 현대아산 사장)의 회고.

"정주영 회장께선 아산농장에 소를 키울 때부터 언젠가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가겠다는 구상을 해왔다. 육로 방북에 난색을 표했던 북한도 식량난 해결에 해갈이 될 소떼 방북에는 동의했다."

소떼 방북 후 곧 이뤄질 것 같던 금강산 사업은 다시 북한 잠수정 침투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해서 현대 금강호가 출범, 금강산 관광시대의 막을 연 것은 예정을 한달여 넘긴 11월 18일이었다.

현대그룹이 만들어 낸 이런 해빙무드는 DJ가 2000년 3월 15일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을 특사로 임명,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이뤄내는데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이 무렵부터 현대그룹엔 암운이 끼기 시작한다.

현대투자신탁에 이어 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본격적인 자금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형제간 갈등 속에 대북사업에 몰두하던 현대는 제대로 수습책을 내놓지 못하고 오히려 정부 지원에 기대려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당시 현대는 정부 지원을 요구하며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 비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대북사업 등에 영향이 있으니 현대를 도와줘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그러나 경제부처 쪽은 '5대 그룹 구조조정은 원칙대로 해야 한다'며 현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보니 DJ로서도 현대만 특혜를 주거나 구조조정에서 '열외'시킬 수 없었다."

더욱이 2년 동안 금강산 관광사업이 낸 성적표는 참담했다.

2000년 10월말 현재 6억1천만달러를 투자해 벌어들인 수입은 2억3천만달러가 고작이었다. 3억8천만달러가 적자였다.

그동안엔 이 부담을 현대건설·상선·전자 등 계열사들이 나눠졌지만 이것이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현대상선도 6개월 뒤인 2001년 4월엔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손을 뗀다.

그해 4월 17일 현대 계열사 사장단 회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약 한달 전인 3월 21일 정주영의 작고로 대북사업은 물론 현대그룹의 앞날마저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금강산 사업은 선친의 유지(遺志)가 담긴 것이니 절대 포기해선 안됩니다"(정몽헌)

"그러나 금강산 사업을 지원하면 부도를 내겠다고 채권단이 저렇게 엄포를 놓으니 도와줄 방법이 없습니다."(계열사 사장들)

"그렇다면 어려움이 많겠지만 현대아산이 독자적으로 해보십시오."(정몽헌)

"꼭 금강산 사업을 성공시켜보겠습니다."(김윤규)

남은 길은 두 갈래-.

금강산 관광사업을 중도에 포기하느냐, 아니면 정부나 다른 기업의 지원을 얻어내느냐.

현대는 통일부·국정원·청와대 등 대북사업을 주관해온 부처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한편 정몽헌은 6월 8일 방북, 북측과 최종 담판을 벌여 북측의 대폭 양보를 얻어낸다. 육로관광 허용과 개성공단 개발, 지금까지 다달이 일정액을 주던 관광대가를 관광객수에 비례해 주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김윤규의 회고.

"이런 조건이면 금강산 관광사업이 충분히 수익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6월 10일 조홍규 관광공사 사장을 찾아가 관광사업 참여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지분은 얼마든지 내주겠다고 했다."

2001년 6월 중순.

금강산 관광사업 관련부처 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초 관광공사를 금강산 사업에 참여시키자는 아이디어는 통일부에서 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문화관광부가 반대했다.

"주무부처와 사전 협의도 없이 관광공사를 참여시키는 것은 곤란합니다. 차라리 남북협력기금을 동원합시다."(김한길 당시 문광부장관)

"금강산 관광사업을 그냥 중단할 수 없으니 관광공사를 참여시키자는 것 아닙니까."(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남북협력기금은 중소기업의 남북교류에만 지원토록 돼 있어 당장 동원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관광공사를 참여시키고 나중에 기금지원 방안을 모색합시다."(진념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익명을 요구한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의 증언.

"당시 북측이 먼저 남북협력기금으로 금강산 사업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해왔다.현대와의 조율을 거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부가 기금을 동원해 초·중·고생이나 교사의 금강산 관광을 지원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6월 20일, 관광공사는 현대아산에 9백억원을 출자, 금강산 사업에 참여한다고 발표한다.

끊길 뻔했던 금강산 관광길은 이렇게 근근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너 일가가 대북사업에 매달리는 동안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을 비롯, 현대투자신탁·현대증권·현대전자(현 하이닉스) 등은 차례로 쓰러져가고 있었다.

<특별취재반>

팀장:김수길 전문기자

기자:이정재·정경민·이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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