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빠진 사람들 ‘시와 그림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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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철학 서적 대신 그림과 시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언어·문학·역사·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풀이는 의미가 없다. 인문학은 무엇이든 알고 싶은 욕구로 가득찬 새로운 세상이다.

“평면적인 그림이에요. 선이나 인물이 공간과 구별돼 만화적인 느낌이죠. 이 그림엔 너무 많은 게 담긴 것 같아요.” “쓸데없는 걸 담았다는 뜻인가요?” “그보다는 효과적이지 않아 보이는 거죠.”

12일 오후 7시 문지문화원(마포구 동교동)의 한 강의실. 화가 정수진의 ‘핑크, 떨어지다’란 작품을 두고 수강생들의 감상이 오가고 있다. ‘시와 그림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인문학 강좌다. 시 쓰는 법을 배우는 강좌인데 방식이 색다르다. 매주 다른 화가의 그림에 대한 감상을 나누면서 거기서 얻은 영감을 시로 옮긴다. 반대로 시를 써서 그림을 상상하기도 한다.

수강생들의 직업은 예술고 학생, 대학 강사, 소설가 지망생, 출판사 편집부 에디터 등 각양각색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만큼 다양하다. 말 그대로 ‘시와 그림’이라는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인 셈이다. 여행의 안내자는 시인인 이원 교수(동국대·서울예대 문예창작과)다.

이곳에서 2년째 강의를 맡고 있는 이 교수는 “최근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을 꺼냈다. “인원이 넘쳐 일부 신청자들이 수강을 못하기도 해요. 사람들이 그동안 인문학을 흥미롭게 배울 수 기회가 없었구나 싶었죠.”

그가 말하는 흥미로움이란 ‘두근거림’이다. 어떤 그림을 봤을 때의 기분 좋은 떨림,시나 소설의 한 구절이 주는 감동 같은 것 말이다. 이 교수는 이런 두근거림을 느끼기 위해선 “어떤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느닷없이 만나는 게 중요해요. 즉 사전 지식이 없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만났을 때 느끼는 두근거림이죠. 예를 들어 화가의 프로필을 알고 보는 그림은 감동과 놀라움의 강도를 떨어뜨려요.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솔직해지거든요.”

솔직해지면 용감해진다. 평소 드러내지 못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낯선 그림에 대한 느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로 써내려 가다보면 기대 이상의 표현력이 쏟아지기도 한다. 바로 이 강좌의 매력이다.

소설가 지망생 김애리(27·은평구 녹번동)씨는 무엇보다 “사고의 전환이 됐다”고 말했다. “다양한 그림을 접하고 그에 대한 표현에 솔직해지면서 어느새 내 자신이 자유로워지더라”는 것이다. “예전엔 내가 가진 독특한 성격을 남에게 보이는 게 힘들었어요. 그림을 보는 시각도 하나로 정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라는 자신을 좀 더 인정하게 됐죠.”

회화를 전공한 이도한(47·경기 고양시)씨는 그림 그리는 데 영감을 얻기 위해 인문학강좌에 발을 들여놨다. “끊임없이 느낌을 나누고 시를 정독하고 창작하는 강의 덕분에 그림보다 시에 푹 빠지게 됐다”는 이씨는 “시인 등단까지는 아니어도 그 과정을 밟아보고 싶다”는 속내를 내보였다. 얼마 전엔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하나둘 하고픈 일이 늘어나면서 시각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같은 고전이라도 읽는 사람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매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이 교수는 “딱딱해 보이는 내용을 흥미롭게 얘기해줄 수 있는, 이 시대에 맞는 인문학 강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설명]문지문화원의 인문학 강의 시간. 이원 교수(오른쪽)와 수강생들이 그림을 보고 받은 감상을 시로 써 발표하고 있다.

< 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 사진=김진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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