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개방'협상 따로 정책 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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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3년 1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 라운드(UR)협상 당시 정부는 미국 등과 이틀간 철야회담 끝에 '10년간 쌀시장 개방 유예'를 얻어냈다. 대신 부속합의를 통해 몇 가지 약속을 해주었고 그 중 하나가 '감산'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 8년여 세월이 흘렀지만 이 조건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런 조건이 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간 정부가 이를 이행하려는 노력도, 알리려는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2004년 쌀시장 개방 재협상 시한은 1년여 앞으로 닥쳤고, 미국 등 쌀 수출국들은 '감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개방을 요구할 기세다.'잃어버린 8년'으로 인해 재협상에 대비한 협상력도 정부 스스로 잃어버린 셈이다.

◇재협상에 치명적=정부가 UR협상 당시 합의한 부속조건은 '수출보조금을 주지 않을 것' '효과적인 생산제한조치(감산)가 적용될 것' 등 5개 항이다. 이 중 문제는 '감산' 조항. 쉽게 풀이하면 우리가 생산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을 할테니 수입 개방을 미뤄달라는 뜻이다. 이 조항을 못 지킬 경우 개방 유예기간 중 불이익을 받진 않지만 다음 재협상 때 개방을 또 미뤄달라고 주장할 명분이 없어진다.

이미 쌀 수출국들은 99년 뉴라운드 출범을 다뤘던 시애틀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한국의 쌀시장 개방 유예에 문제가 많다"며 "예외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94년 한국과 함께 관세화 유예를 받았던 일본은 일정을 앞당겨 99년 이미 개방했기 때문에 재협상 때 한국은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할 처지다.

◇거꾸로 간 쌀 정책=일본은 꾸준히 수매가를 내려 쌀시장 개방에 대비했으나 한국은 UR협정이 시행된 95년 이후 다섯차례나 수매가를 올렸다. 과잉 재고가 문제가 된 지난해에는 양곡유통위원회의가 올해 수매가를 4~5% 인하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동결로 바뀌었다. 농민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밭에까지 벼를 심어왔고, 생산량 증가로 올 쌀 재고는 사상 최대인 1천3백만섬을 넘어설 전망이다.

쌀을 사료용으로 쓰는 방안이 검토될 정도로 과잉 재고가 심각해지는 데도 농민들의 반발로 전작(쌀 대신 다른 작물을 심는 것)·휴경(쌀 농사를 쉬는 것)보상제 등 '생산조정제'와 쌀을 수매가가 아닌 시가로 사들이는 '공공비축제'는 2005년 이후로 미뤄진 상태다.

◇대책도, 설득도 없었다=93년 UR협상 결과 발표 때 감산 등 부대조건을 간략히 밝힌 것을 제외하고는 정부가 이를 거론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협상 직후 발행한 외무부의 'UR 협상 결과 및 평가서'나 농촌경제연구원의 'UR 농산물협상 백서'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농민은 이같은 부속조건이 붙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정부는 "최선을 다해 개방을 막겠다"는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해 왔다. 그 결과 농민들은 '재협상에서도 개방은 미뤄질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통일 후 쌀 수급에 대비해서라도 쌀시장을 개방해선 안된다"는 주장을 띄워놓고 있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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