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만 읽어도 책이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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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책의 '차례'를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내 생각에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박장대소하는 드라큘라 숫자가 더 많을 듯 싶다. 뭐라고라? 날 뭘로 보는 겨? 늬는 얼마나 아는데?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대들면 다시 차분히 말하겠다. 독서를 할 때 차례의 중요성에 대해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책 읽을 때 차례를 보십니까? 제대로 활용하십니까?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이렇게 강조해야 하는 차례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바로 독서교육을 등한히 해 온 그간의 교육 현실 때문이다. 책이라야 그저 교과서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구태의연한 교수 학습 방식에 차례가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매번 일정한 분량을 공부하며 "밑줄 쫙!, 돼지 꼬리 띵야 그려!"하며 외우기 바쁜데.

이제라도 주변의 책들에서 차례를 뒤적거려 보자. 생활 속의 정치 이야기를 쉽게 풀어주는 책 『수상은 수영장에 산다?』(도리스 슈뢰더-쾨프 엮음, 다른우리)가 눈에 띈다. 예쁜 그림이 곁들여진 차례가 있다. 그래, 차례라고 해서 꼭 글만 있을 필요는 없지. 아름다운 그림과 사진으로만 참신하게 차례를 만들면 어떨까. 기존 책들의 차례도 주택 리모델링처럼 완전히 바꿔 보면 좋겠다.

어라, 차례가 없는 책들도 있네. 방대한 양의 지식을 일러스트와 함께 간결하고 재미있게 줄여 내는 시리즈 『하룻밤의 지식여행』(김영사), 예술 삽화와 함께 보는 그래픽 북스 시리즈 『이두아이콘 총서』(이두)는 고교생 이상 수준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기획의 소산들인데 차례가 없다는 점마저 닮았다. 이런 책들의 차례를 만들어 보라는 활동이나 과제를 내주면 딱 좋겠다. 차례가 없는 문학 작품, 특히 단편의 경우 차례를 만들게 하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확인하는데 안성맞춤이다.

차례가 아주 자세한 책들도 간혹 눈에 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유랑』(중명출판사)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고 즐기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차례에 쓰여진 여정의 그 많은 지명들을 꼼꼼하게 다 읽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도 손으로 짚어 보며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무난한 차례들도 셀 수 없이 많이 나타난다. 이들 차례를 보면서 내용과 제목을 떠올리며 원래의 경우와 견줘 보면 재미있다. 자연스럽게 상상력과 추리력이 쑥쑥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실제로 차례에 쓰여진 표현을 자세히 보면 책의 성격과 독자층·제목을 맞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노빈손의 가을여행』(함윤미 외, 뜨인돌) 차례의 첫번째 단원 제목은 '가을이 왔시유'다. 이 책의 서술 태도와 독자층은?

어떤 경우든지 차례는 중요하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다뤘는가를 또렷이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즉 저자가 글을 쓰면서 무엇을 넣고 뺐는지(선택의 차원), 어느 정도 중요하게 파악하는지(비중의 차원), 과연 어떻게 요리하는지(방식의 차원) 알 수 있다. 서술 대상의 선택과 비중, 방식을 이해하면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끝으로 논리적 사고를 강조하고 싶다면 유개념과 종개념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확인·평가할 수 있다. 흥미를 북돋우며 활기차게 이끌고 싶다면 차례에 관심을 갖고 퀴즈나 게임, 경연 대회 등 다양한 형태로 활용할 수 있다.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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