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리동네 이문제] 천안 성정동 빌라 세입자 발동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최근 법원의 경매 개시가 결정된 천안 성정동의 한 빌라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받지 못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조영회 기자]

“도와주세요. 어디에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아내와 아이들만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에 늘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해결 방안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사나요.” 다가구 주택(빌라) 경매로 인한 세입자들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계약 당시 집 주인과 부동산중개업소의 말만 믿고 계약을 체결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꼼꼼히 따져보고 집을 구해야 한다는 건 잘 알지만 이토록 세상이 각박할 줄은 몰랐다. 경매 개시 이후 일부 가정은 불운까지 겹치면서 하루하루 근심과 걱정 속에 밤을 지새우고 있다.

글=강태우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1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는 14일 오후. 땀에 흠뻑 젖은 문모(32)씨가 회사에서 짬을 내 집에 들렀다. 최근 집이 경매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303호 현관문을 열자 큰 딸(7)과 작은 딸(5)이 아빠 품에 안기려고 달려들었다. 일찍 들어온 아빠가 마냥 좋아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거실과 방에 붙은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집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은 참고 견디면 머잖은 날에 기쁨이 오리니…” 거실 액자 속 글을 되뇌고 되뇌여 보지만 가슴속에서는 계속 화가 치민다.

지난 2004년 광주에서 천안으로 이사온 문씨는 2008년 3월 70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다. 광주에서 100만원을 들고 천안의 원룸과 단칸방 주택을 전전하며 열심히 벌었다. 4년 만에 2000만원을 모았지만 전세금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고민 끝에 근로자전세대출을 받아 4900만원을 마련해 보탰다. 빚이었지만 이전보다 조금은 넓은 50㎡(15평) 공간에서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며 빚을 갚아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입주를 결정했다.

하지만 계약기간 2년이 지난 지금 전세금 반환은 고사하고 법원의 경매 개시에 졸지에 거리에 나 앉게 생겼다. 전세자금 대출로 매달 30만원에 이르는 이자만 내고 있다. 문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막막하다”며 “힘들게 모으고 대출받은 돈을 돌려받지 못한 것도 억울하고 그렇다고 개인파산을 하면 일을 할 수 없게 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 301호에 사는 정모(28)씨. 지역의 한 중소 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정씨는 2008년 9월 6500만원을 주고 전세로 입주했다. 몇 달 뒤면 계약이 끝나 돈을 돌려 받아야 한다. 하지만 경매가 진행돼 받을 길이 없다. 문제는 4개월된 둘째 아이. 지난 5월부터 서울대학병원 어린이병동에 입원 중이다. 대장과 소장이 붙어 대수술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원인도 모른다. 지금까지 들어간 병원비만 3000만원이 넘는다. 첫째는 돌봐줄 사람이 없어 대전 할머니 집에 맡겼다.

3교대 근무를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시간만 나면 서울과 대전을 다니며 기약할 수 없는 병마와 싸우는 아이를 보러 간다. 거실 천장에 매달린 아기용 모빌이 쓸쓸히 어린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거실 구석에는 아이들이 먹던 과자와 동화책이 어지럽게 나뒹군다. 정씨는 얼마 전 법원으로부터 집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매 절차가 진행되니 22일까지 법원에 배당요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건물이 통째로 경매에 들어간 데다 1순위가 금융권으로 설정돼 돈을 돌려받을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세입자가 우선적으로 변제 받을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그러나 변제 받을 수 있는 보증금 기준이 계약 당시 3000만원(현재는 4000만원으로 상향 조정됨) 이내여야 한다.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11가구 대부분이 이 기준을 모두 넘어선 3300~7000만원에 계약을 맺었다. 유일하게 1가구가 2800만원에 들어갔지만 등기에도 없는 불법건물에 입주해 이마저도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3 203호에 사는 최모(42)씨의 사정은 더하다. 2008년 2월 입주해 이미 계약기간을 넘겼다. 6500만원에 입주했지만 집 주인과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세금은 고사하고 이곳으로 이사 온 뒤부터 불운까지 겹쳐 아내가 투병 중이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 낮에는 아내와 함께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돈을모아 새 아파트로 이사 가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지난해 10월 건강하던 아내가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지만 암 세포가 난소로 전이되면서 또다시 힘겨운 투병이 이어지고 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누구보다 건강한 아내였다.

회사를 마치고 나면 청소와 빨래등 가정 일도 모두 정씨의 몫이다. 흐트러진 가정을 보면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어 결국 한 달간 휴가를 냈다. 아내를 위해 몸에 좋은 식품을 찾아 다니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에게 두 아이를 맡겼다.

정씨는 “이사 오기 전 은행으로부터 많은 돈을 저당 잡힌 사실을 알고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집 주인과 중개업소가 안심시켰고 은행을 통해 전세자금 대출까지 소개해 주는 배려 덕분에 입주를 결정했다”면서 “하지만 계약하던 해에 중개업소는 없어지고 집 주인은 법대로 하라는 식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고 하소연 했다.

이 빌라는 건물주가 개인이 아닌 유한회사 소유다. 유한회사는 50인 이하의 유한 책임 사원으로 조직되는 회사로 사원들은 자본에 대한 출자 의무를 부담하지만 회사 채무 대해서는 출자액 한도 내에서만 책임을 지는 구조다. 따라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갈 경우 유한회사 구성원은 법적으로 채무관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결국 입주자들만 피해를 보기 쉽다.

입주민들은 “가족으로 구성된 유한회사가 수억원에 달하는 입주민들의 전세금을 받아 챙긴 뒤 경매로 책임은 회피하고 은행 이자와 세금, 공사대금은 갚지 않는 악덕회사이고, 몇 채의 건물을 이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다”며 사기혐의로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 S사(유한회사) 관계자는 “돈이 없어서 은행 이자를 내지 못했다. 아직 경매가 진행 중이지 경매로 집이 넘어 간 것은 아니다. 입주민 피해라는 건 보증금을 제 때 돌려 받지 못한 것이다. 법에 의해서 처리될 것이다. 편한 대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