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체 파산族'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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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얼마 전까지 촉망받는 대기업 중간간부였던 金모(33)씨. 그는 "정상적인 투자 실패로 진 빚(1억3천만원)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고 법원에 호소, 지난해 8월 파산 선고를 받아냈다. 선고 직후 그는 남은 채무를 탕감받기 위한 면책(免責)을 신청했다.

하지만 서울지법 파산부는 金씨가 '불량(不良)' 파산자라고 판단, 지난달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법원은 金씨가 일확천금을 노리고 사기꾼에게 투자해 돈을 날렸기 때문에 건전한 경제 행위 과정에서 빚을 진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金씨는 부도난 매장의 물건을 싼 값에 사서 파는 사업에 자신의 재산은 물론 부하 직원들의 푼돈까지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끌어들여 투자했다가 몽땅 날렸다. 게다가 법원의 면책 신문 과정에서 빚을 진 상태에서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아내 이름으로 옮긴 뒤 이혼한 사실도 들통나고 말았다.

金씨처럼 자신의 잘못으로 빚을 졌음에도 이를 감추거나 채무 상태를 거짓 신고해 빚을 면제받으려는 '얌체' 파산자가 법원에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면책제도는 성실하게 살았지만 불운(不運) 등으로 인해 과도한 빚을 지게 돼 파산이 선고된 채무자에게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법적 장치다.

법원은 파산이 선고된 뒤 면책을 신청한 사람들에 대해 3~4개월 동안 신문과 채권자 의견 등을 거쳐 면책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면책이 허가되지 않으면 기존의 채무를 갚아야 함은 물론, 파산자로서의 불이익도 함께 감수해야 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주식투자로 1억여원의 빚을 진 주부 李모(35)씨 역시 면책을 받지 못했다. 1997년 자기 돈 1천만원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한 李씨는 98년부터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으면서 투자에 몰입했다. 대출금은 4천만원으로 불어났다. 이어 친척에게서도 4천여만원을 빌렸다.

그러나 결국 1억원에 가까운 투자금을 날리고 지난해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법원은 李씨가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투자로 파산에 이른 만큼 구제해 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밖에 법원은 최근 과도한 투자로 2억여원의 빚을 지고 지급불능 상태로 파산이 선고된 사업가 朴모(59)씨가 낸 면책 신청도 "부인 명의로 빼돌린 부동산이 있다"며 불허 결정했다.

올 상반기(1~6월)까지 서울지법에 접수된 파산신청 건수는 1백84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 가량 증가했다.

서울지법 파산부 관계자는 "전체 파산 신청이 늘면서 갖가지 수법을 동원, 빚을 탕감받으려는 사람들이 덩달아 많아져, 판단에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20,30대 젊은 층의 면책제도 문의가 부쩍 늘었다"며 "이중 상당수는 신용카드를 함부로 써 파산한 경우"라고 덧붙였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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