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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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과거 캐러밴이 실크로드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16세기 말부터 바다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던 주역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동양과의 교역에 적극적으로 나서, 향료의 산지인 몰루카 제도와 일본에 진출했고 1619년엔 현재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하는 식민지를 세웠다. 또 1621년엔 서인도 회사를 조직해 현재의 뉴욕에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당시 네덜란드가 세웠던 동인도 회사는 자본금 규모(약 50만파운드)에 있어 영국이 자랑하던 동인도 회사의 열배였다. 또 활동이나 성과도 그 이상갔다. 예를 들어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일본에서 수입한 은(銀)은 연간 20만㎏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전체가 신대륙에서 수입한 은의 총량과 비슷했다.

그 결과 암스테르담은 유럽 금융거래의 중심이 됐고 무역업자들은 모두 암스테르담 외환은행을 통해 거래했다. 유럽은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세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스페인령이었던 네덜란드가 본격적인 국가의 틀을 갖춘 것은 홀란드 등 7개 주의 독립이 완성된 1581년이었다. 이런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한 지 불과 20여년 만에 유럽의 강국 반열에 올랐으니 당시 유럽 국가들이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17세기에 이미 후발 신생 독립국의 선진국 진입 신화를 만들어 낸 네덜란드의 성장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흔히 칼빈주의와 당시 무역의 기반이 됐던 조선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꼽는다.

신교인 칼빈주의는 상인자본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동양 선교에 적극적이었던 가톨릭과 달리 적극적 선교를 펼치지 않아 특히 일본에서 환영을 받았다. 또 조선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로 건조비용(영국에 비해 50% 이상 저렴)과 조선능력(연간 2천척)에 있어 당시의 선진국을 압도해 무역 경쟁력을 확보했다. 그 결과 1670년 네덜란드가 보유한 선박의 숫자는 영국·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의 배를 전부 합한 것보다 많아 중계무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최근 히딩크 열풍과 함께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일시적 유행이나 인물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이미 17세기에 압축성장을 이룩하고 여전히 세계 금융과 물류의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네덜란드의 성장비결과 생존전략을 폭넓게 이해하고 연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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