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러 비자 싸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장차 유럽연합(EU)권에 갇히게 될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EU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원래 동프로이센의 주도로, 쾨니히스베르크로 불렸던 칼리닌그라드는 1945년 소련에 합병됐다가 소련 해체 후 주변국들이 독립하면서 러시아의 '엑스클레이브(역외영토)'가 됐다.

문제는 2004년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EU에 가입하면 칼리닌그라드 주민 1백만명이 EU 역내에 고립된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칼리닌그라드와 러시아 본토 주민들이 왕래할 때마다 경유 국가인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EU 역내의 국경개방을 규정한 셴겐조약이 역외국가에 대해선 비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칼리닌그라드와 본토를 오갈 경우 비자는 면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 땅을 가는데 비자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엔 전략적 고려도 깔려 있다.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가 발트해로 진출하는 유일한 출구면서 연간 8백여만 내·외국인들이 출입하는 요충지다. 또 발틱 함대 기지가 이곳에 있다. 군수물자 이동 때마다 비자를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EU도 간단히 양보할 태세는 아니다. 이곳을 무대로 한 러시아인의 불법이민과 마약 밀수로 이미 골치가 아픈데 무비자 통과까지 허용하면 칼리닌그라드가 불법천지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EU는 러시아인들에게 장기 복수비자를 발급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러시아인들의 기본권이 무시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재천명했다. 이에 따라 칼리닌그라드주는 '리투아니아를 통과하는 열차 승객은 무비자로 입국하되 열차에 국경수비대가 동승해 무정차로 통과한다'는 절충안을 내놨지만 합의 가능성은 아직 요원하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