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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웨이하이(威海)서 배농사 김형기 씨 : 韓·中 배나무 접목 '최고의 糖度' 결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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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중국어에 '롄리'(連理)라는 말이 있다. 두 개의 나뭇가지가 붙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은 지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이 긴 세월 동안 한국과 중국 어딘가에 '롄리'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산둥(山東)성 자오둥(膠東)반도의 끝자락. 거칠고 너른 화베이(華北)평원의 밀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낮은 구릉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 그 밑에 살짝 가려진 웨이하이(威海·지도) 인근의 배밭만한 '롄리'가 또 있을까.

중국에서 배가 가장 풍성하게 자라는 이곳에선 요즘 소리 없는 '배들의 전쟁'이 한창이다.

전쟁의 첫 총성은 10년 전에 울렸다. 당시 대만의 과수업자들은 맛이 뛰어난 일본배를 들여와 이곳에 배 재배 단지를 만들었다. 일본배는 단맛을 무기로 중국의 '돌배'를 단번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일본·대만으로 향하는 수출길도 장악했다.

그런데 요즘 일본배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국배 때문이다. 한국배는 1997년 처음 웨이하이 땅을 밟았다. 일본배 재배업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웬걸, 모양 투박한 한국배는 지난해 일본배를 제치고 도매상들 사이에서 '가장 단 배'로 뽑히는 기적을 일궈냈다.

기자가 보기에 이 한국배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롄리'다. 왜냐하면 이 배는 한국에서 자란 배나무의 가지를 잘라다 웨이하이산 배나무에 접목(接木)해 만들어낸 교배종이기 때문이다.

이 '한·중 롄리'로 일본배에 도전장을 낸 한국의 농사꾼이 김형기(金炯基·62)씨다. 그는 이미 이곳에 1백30여만평의 한국 배밭을 조성했다.

金씨는 본디 농사꾼이 아니었다. 수산물 가공업자였다. 한·중 수교 훨씬 전인 89년 일찌감치 중국산 수산물을 한국으로 실어나른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왜 배 농사에 손을 댔을까.

金씨가 짠물에서 배밭으로 삶의 무대를 바꾼 데는 아픈 사연이 있다. 그는 한때 전라북도 부안 앞바다에서 열여덟 곳의 양식장을 운영하던 알부자였다. 하지만 89년 이 지역에 들이닥친 태풍으로 졸지에 빈손이 됐다.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여러 가지 몹쓸 생각도 났고….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억울하니까요. 그때 마침 한 일본인 친구가 찾아와 '중국에 가서 당신이 직접 골라 보내는 수산물이면 모두 받겠다'고 제의하더군요. 이거다 싶었지요. 앞뒤 안보고 그냥 웨이하이에 왔습니다."

웨이하이에서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한국 업체들이 이곳에 거의 진출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수산물 가공 기술은 즉각 먹혀들었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어패류 양식업부터 수산물 가공업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웨이하이의 너른 배밭을 보게 됐지요. 왠지 가슴이 저릿하더군요. 갑자기 농사만큼 정직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농사에서라면 인생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무작정 배밭으로 뛰어들었죠."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중국을 '객지'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륙의 넉넉한 품 때문일까. 아니면 중원 문화가 우리에게 친근하기 때문일까.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중국을 제2의 고향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金씨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중국을 집으로 삼았다. 그리고 웨이하이의 배밭에 모든 것을 털어넣었다. 그간 벌었던 돈, 얻었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처음에는 배가 다 죽고 말더군요. 토양 조사를 다시 했지요. 그런데도 잘 크질 않아요. 절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잘못 선택했다고 자책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金씨는 포기하지 않았다.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 선택이 아니던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는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여기 저기 전문가를 찾아다녔어요. 수십번 수백번 실험을 했지요. 결국은 답이 나오더군요."

그는 지난해에야 첫 배를 수확했다. 당도(糖度)는 15도였다. 한국의 '신고'와 '20세기' 등 우수 품종의 당도가 기껏해야 12도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다. 같은 산둥성에서 생산되는 배들은 10도를 넘지 못한다.

金씨는 첫 수확을 한 뒤 곧바로 전시회를 열었다. 맛을 본 중국 사람들은 "도대체 배에서 이런 맛이 날 수도 있느냐"고 감탄을 연발했다. 金씨는 "이제 됐다"며 무릎을 쳤다.

첫 해 수확은 소량에 불과했다. 아직 배나무가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된 배는 썰물처럼 팔려나갔다. 일본배와 시장을 나눠가졌던 대만배도 金씨의 배를 당해낼 수 없었다.

"대만배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황금색을 띠고 있어요. 당연히 중국인들에게 인기 높을 수밖에 없지요. 단기적으로 많이 팔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2~3개월밖에 보관할 수 없어요. 이런 배로는 저장성이 뛰어난 우리 배와 겨루기 어렵지요. 게다가 승부는 결국 맛에서 나게 마련이거든요."

약간의 목돈을 거머쥔 金씨는 배밭을 늘려나갔다. 우선 자신이 직접 20만평의 배밭을 갈았다. 현지인과 힘을 합쳐 45만평의 배밭을 구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70만평을 추가로 확보했다.

배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그가 도입한 독특한 아이디어가 소 키우기다. 그의 농장 한 구석에서는 5백여 마리의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소 배설물은 배밭의 '땅심'을 키우는 보물덩어리다. 쇠고기까지 팔 수 있어 일석이조다.

金씨의 목표는 두 가지다. 우선 한국배·일본배 등 최상의 배들의 참맛을 알고 있는 대만·홍콩·싱가포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 본토에 올라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그가 노리는 최후의 목표다. 한국 진출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한국배에 밀릴까봐 겁이 나기 때문은 아닙니다. 값싼 인건비로 생산한 배를 한국으로 고스란히 수출했다가는 국내 배 농가가 남아나기 어렵지요. 같은 민족 농사꾼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金씨는 몸이 중국에 있어도 마음은 한국에 사는 것 같았다.

"저는 한국배와 중국배를 섞어 제대로 된 배를 만들어 냈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그러나 이것은 첫 단계에 불과하죠. 최상의 배를 만들어 중국 시장을 뒤덮는 게 꿈입니다.'이 꿈은 가능하다.' 이렇게 저 자신에게 말하고 있지요."

자신을 농사꾼으로 만들어준 대륙에 배 맛으로 보답하려는 것일까. 대륙에서 꾸는 농사꾼 金씨의 꿈은 야무지기만 하다.

웨이하이=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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