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특종의 순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른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5호 10면

<1> 에디 애덤스, ‘베트콩 사형집행’, 1968년 2월 1일 베트남 사이공에서 촬영. 1969년 퓰리처상 수상. <2> 총살 현장에 에디 애덤스 기자와 함께 있었던 김용택 기자가 촬영한 연행되는 베트콩 모습. <3> 케빈 카터,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 1993년 3월 23일 수단 아요드에서 촬영. 1994년 퓰리처상 수상.

사진기는 제2의 눈이다. 두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사진기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가의 능력에 따라 보는 범위는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사진가로도 불리는 사진기자란 특이한 존재다. 그들은 살생이 일상인 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간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때론 피사체보다 먼저 죽음과 마주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은 사진기자들의 사진기가 지켜보는 또 다른 일상이었다. 베트남전은 대표적인 사진기자의 전쟁터였다. 베트남전은 밀림 그리고 도시에서도 살상이 이뤄졌다. 이 전쟁의 장면들은 사진기자에 의해 포착됐다.

퓰리처상 수상자 에디 애덤스케빈 카터

1968년 1월 30일 이른바 ‘구정공세’라 불리는 전투로 월맹군은 베트남의 3개 성도와 5개 해안도시를 공격했다. 사이공의 미 대사관도 베트콩에 의해 일부 점령되기도 했다. AP통신의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사진)는 사이공 거리에서 죄수를 호송 중인 월남 군인을 본다. 그 죄수는 월남군 대령과 그 부인, 어린이 6명을 살해했다. 애덤스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들은 죄수를 거리 구석으로 걷게 했습니다. 죄수는 베트콩이었죠.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어요. 나는 약 1.5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가 권총을 빼 들었습니다.” 권총 든 사람은 월남 경찰책임자인 응우옌 능곡 로안 장군이었다. 로안은 권총을, 애덤스는 사진기를 들어올렸다. 총성과 함께 애덤스는 셔터를 눌렀고 이 사진은 1969년 퓰리처상을 받는다.

이 해의 퓰리처상은 우리나라 사진기자가 받을 수도 있었다. 동아일보의 김용택 기자는 애덤스 곁에 있었다. 사진기자는 둘뿐이었다. 당시 김 기자는 1967년 4월부터 월남 종군기자로 있다가 특파원 교대를 위해 사이공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1995년 출판한 사진집 ‘역사의 찰나’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AP통신의 세계적인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와 단둘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나는 로안 장군이 베트콩 장교의 머리를 겨냥, 막 발사하려는 순간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쓰러진 장면부터 카메라에 담았다.” 인간적인 갈등으로 낙종한 것이다. 김용택 기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실명해 말년을 힘겹게 보내다 2007년 5월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김 기자는 고엽제 후유증 피해보상금을 5년간 모은 1억원을 후배들을 위해 한국사진기자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사진기자회는 이 기금으로 현재 김용택 기자상을 제정해 운용하고 있다.

애덤스의 사진은 반전단체에 의해 과도한 전쟁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벌거벗은 소녀가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사진(후잉 콩 닉 우트, 1973년 퓰리처상 수상), 틱쾅둑 스님의 분신 사진(맬컴 브라운, 1963)과 함께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일으킨 3대 사진으로 꼽힌다.

극적인 사진은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눌러야만 건질 수 있다. 끔찍한 장면도 촬영해야 하는 것이 사진기자의 숙명이다. 그래서 사진기자는 인간이 아닌 듯이 보일 수 있다. 케빈 카터(사진)는 이런 오해를 받았다. 그가 1993년 3월에 찍은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 사진이 뉴욕타임스에 실리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이 사진은 기근 피해주민 구호를 위해 수단 아요드에 마련된 식량배급소 근처에서 촬영했다. 동물 사체를 먹는 독수리가 어린이 뒤에서 기다리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해석할 피사체가 적은 이 사진은 독자들이 ‘왜 아이만 혼자 있지? 다른 사람들은?’ 등의 궁금증을 일으켰다.

사진은 아프리카 기아의 상징이 됐다. 상징이 된 사진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면서 사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촬영 당시의 정보가 없는 독자들은 오해를 했다. ‘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만 찍을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퓰리처상 수상 발표 석 달 뒤인 1994년 7월 27일 카터는 남아공 산톤에 있는 자택 근처 공원에서 배기가스를 차 안으로 연결해 자살한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러자 오해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생명경시로 비난받던 사진기자가 자살했다는 식이었다.

촬영 당시 진짜 상황은 어땠을까? 일본 마이니치신문 남아공 특파원인 후지와라 아키오가 촬영 현장에 함께 갔던 카터의 동료 조아오 실버를 만나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당시 케빈 카터는 부업이었던 심야 디스크 자키도, 라디오 토크쇼 일도 계약이 끝났고 이혼까지 당한 상태라 변변히 끼니조차 챙기지 못했다. 카메라마저 전당포에 맡길 정도였다. 이런 그를 기아 현장에 가자고 이끌었다. 카터와 실버는 원조식량 운송하는 유엔 소속 비행기를 타고 수단 아요드에 도착한다. 곧 비행기가 이륙할 예정이라 촬영시간은 30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아현장 취재가 처음인 케빈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굶주린 아이들을 계속 찍었다. 사진 속 어린이도 어머니가 식량을 얻느라 잠시 아이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그때 독수리가 날아왔고 케빈은 빌려온 180㎜ 렌즈밖에 없어 살그머니 몸을 10여m 옮겨 찍었다. 몇 장 찍는데 독수리는 날아갔다. 1994년 9월 12일자 타임지에 스콧 맥 레오드가 쓴 기사도 감상적이긴 하나 내용은 비슷하다. 카터는 운이 좋았다. 그때 그런 장면이 있었고 그는 놓치지 않고 찍었다.

실버는 카터가 있는 곳에 왔을 때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고개를 젖힌 채 담배를 피우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찍었어 해냈어! 찍었단 말이야! 대단한 걸 내가 찍었어!’ 하면서 곧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였다. 나는 속으로 ‘또 도졌군’ 하면서 가자고 재촉했다. 카터가 ‘집에 돌아가 딸(당시 9세)을 안아줘야지’라고 말했다. 정말 어디가 이상해진 것처럼 보였다. 난 아직 사진을 보기 전이었으니 그의 기분을 짐작할 턱이 없었다.”

카터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반박하진 않았다. 하지만, 현지 신문 취재에 “그런 현장에 가본 적조차 없는 인간들에게 개인적인 체험을 들려주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대답했다. 또 “상황이나 폭력에 관한 진부한 의견을 듣게 되면 내 뇌는 셔터를 내리고 만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원래 섬세한 성격인 카터는 독자 반응에 신경을 썼다고 실버는 말했다.

1961년생인 케빈 카터는 남아공이 흑백분리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방방클럽(Bang Bang Club)으로 불리던 사진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방방클럽은 전쟁터 같은 현장도 겁없이 뛰어드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남아공에서 일하던 다른 외신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퓰리처상 수상 통보를 받고 난 뒤인 1994년 4월 18일 그와 동료는 폭력 사태 취재를 위해 토고자로 갔다. 카터는 먼저 시내로 돌아왔으나 동료인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되고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을 입는다. 이때 카터는 큰 충격을 받았고 다음 날 폭력 사태가 악화됐음에도 현장을 찾았다. 나중에 그는 “그 총알은 내가 맞아야 했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카터는 인간생명이 파리 목숨보다도 못한 부조리한 상황에 항시 접하는 사진기자의 삶에 고통을 느꼈다. 그러면서 어려워지는 생활은 그를 마약에까지 손대게 했다. “또 똑같은 꿈을 꾸었어. 내가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구는 거야. 그러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열심히 나를 찍더군.” 카터는 1991년부터 죽을 때까지 꼬박 3년 동안 이런 악몽이 계속됐다고 한다. 결국, 피폐해진 그의 정신은 그의 목숨마저도 앗아갔다.

전쟁과 폭력현장은 사진기자의 목숨까지도 요구한다. 이렇게 얻어진 영상은 처참함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끔찍한 사진이 우리의 양심을 바로 세우기도 한다. 독일 나치의 만행이 일본의 난징 대학살보다 우리 기억에 더 남는 것은 혹시 관련 사진 숫자 차이가 아닐까?



퓰리처상 사진전 8월 29일까지
퓰리처상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가 컬럼비아 대학교에 2백만 달러를 기부해 1917년 창설됐다. 퓰리처상 선정위원회가 매년 4월에 수상자를 발표한다. 뉴스·보도사진 등 14개 부문, 시·소설 등 5개 부문, 드라마 1개 부문, 음악 1개 부문, 총 21개 부문에서 수상자를 선정한다. 보도사진 부문은 1942년부터 시작되었고 1968년부터는 특종사진과 특집사진 두 부문으로 나눠 시상한다. 퓰리처상 사진은 미국 신문에 게재되었던 사진을 대상으로 한다.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8월 29일까지 퓰리처상 사진 145점이 전시된다. 평일과 주말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 목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2-2000-6293
홈페이지 http://www.pulitzerkorea.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