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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0>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39.중국에 공장 건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나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1992년 중국에도 공장을 건설했다. 비싼 임금 때문에 해외진출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는데, 그 두번째 거점이 중국이었다.

내가 중국을 찾은 것은 88년 10월이다. 한국과 아직 국교를 맺지 않은 때였다.

나는 광둥(廣東)성 선전(深?)과 후이저우(惠州)를 방문했고 랴오닝(寧)성 다롄(大連)개발구도 찾아갔다.

이듬해 1월 나는 다롄을 다시 방문했다. 공항에서 임시 입국허가증을 받긴 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을 수시로 오고가려면 정식 비자를 받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다짜고짜 출입국관리소에 갔다.

"한국에서 온 기업가입니다. 중국에 투자를 하려고 왔습니다. 정식 비자를 발급해 주십시오."

"남조선 사람에게는 비자를 내줄 수 없소."

국교가 정상이 아닐 때여서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인은 극히 드물었다. 도착지 공항에서 간이 비자를 받아 입국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정식 비자는 꿈도 못 꿀 때였다. 중국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일단 거절하고 봤던 것이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국장님을 만나게 해주시오."

나는 최고 책임자를 만나면 일이 풀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국장은 바쁩니다.나에게 말하시오."

"나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중국을 좋아해 투자를 하려고 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국장은 끝내 만날 수 없었지만 부국장을 면담할 수 있었다. 내가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자 호감을 가지고 대했다. 그는 특별히 30일간 한국과 중국을 수시로 왕복할 수 있는 비자를 내줬다.

지금이야 두 나라를 자유롭게 오가지만 80년대 말만 해도 중국은 적성 국가나 다름없었다. 경비도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국 공안 요원들에게 어디론가 잡혀가도 하소연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중국 땅을 무턱대고 밟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겁도 없었던 모양이다.

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발생하면서 중국 투자도 보류해야만 했다. 2년쯤 지난 91년 말에야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롄과 칭다오(靑島)를 골랐다. 김형숙 부사장 등 실무진을 현지에 파견했다.면밀히 검토한 결과, 칭다오 리창취(滄區) 스메이안(十梅菴)에 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한국과 가까워서 마음에 드는군."

"칭다오는 항공뿐 아니라 뱃길로도 아주 가깝습니다. 투자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내가 흡족해하자 김부사장이 부연했다.

칭다오는 인천항 서쪽에 마주 바라다보이는 곳이어서 한국과 기후도 비슷했다.

나는 92년 토지를 임대하고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 해에 일부를 준공해 생산을 시작했으며, 다음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그동안 공장을 계속 증설해 지금은 칭다오 제1공장에서 1천7백명이, 라이시(萊西)에 세운 제2공장에선 5백명이 일하고 있다. 관리자 일부만 한국인 이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 중국인들이다.

중국 공장에서 쓰는 원자재는 전량 비비안의 천안 공장에서 가져가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공장에 보내는 것까지 합치면 매월 수출 실적이 2백10만 달러나 된다.

매주 한 번씩 컨테이너 두세 개가 해외로 나간다.국내 공장에서 만든 원자재를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있는 공장에 공급하는 것이다.

해외 공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란제리와 파운데이션을 만들어 일본·미국·유럽 등지에 전량 수출하고 있다. 칭다오 공장에서는 월 2백80만장,연 3천3백만장의 속옷을 생산해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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