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부가 하는 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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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다음 중 어떤 유형의 공무원이 나라 경제에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칠까요 ?

①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사람

②머리는 좋으나 게으른 사람

③머리는 나쁘면서 부지런한 사람

④머리 나쁘고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

예전에는 ③번이 <정답>이었지만 요즘엔 ①번으로 바뀌었답니다. 부지런한 공무원들은 정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데 그러다 보면 하나마나한 정책, 안하느니만 못한 정책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머리 좋은 공무원이 만든 정책은 '포장'을 잘해 부작용이 있어도 당장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는 물론 과천 관가(官街)주변에서 나도는 우스개 소리일 뿐입니다. 아무려면 똑똑하고 부지런한 공무원이 낫지 않겠습니까 ?

지나치게 시니컬한 이야기지만, 그러나 요즘 정부가 하는 일들을 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월드컵 4강에 오르자 정부는 즉각 임시 공휴일을 제정하고, 국민 대축제를 연 뒤, 교통법규 위반자 4백81만명을 사면했습니다. 누구 발상인지 모르지만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놀게 해주고, 벌점도 없애준다는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하지만 과연 '좋은 정책'일까요 ?

공휴일 지정 소식에 기업들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가뜩이나 6월 내내 월드컵 때문에 제대로 일을 못했는데 또 놀면 어떡하냐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많은 중소기업들은 휴일을 반납했습니다. 종업원들을 설득하느라 기업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요. 또 남들은 노는데 '휴일 출근'용단을 내렸던 직원들은 가족들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요.

정부가 펴는 정책은 일종의 '선택'입니다. 효과와 부작용이 있게 마련인데 많은 경우 '효과'는 과대 포장하고, '부작용'은 애써 외면하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최근 논란이 된 한·중 마늘협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2000년 7월 협상 타결 당시 외교통상부가 냈던 보도자료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금번 협상에서 중국은 긴급수입제한 조치 철회를 요구했으나, 우리 측은 이 조치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득해 긴급수입제한 조치 틀을 유지했고, 마늘 수입량도 99년 수준 이하로 동결했다."

이 발표만 보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협상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협상은 '주고 받기'이며, 특히 이 협상은 '실패한 협상'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2002년 말로 못박은 긴급수입제한 조치 종료 시한이 다가오는데도 대책이 없으니 심각한 상황입니다. 차라리 당시에 "앞으로 2년 뒤면 중국산 마늘이 싼 값에 밀물처럼 밀려 들어온다. 우리가 중국에 큰 무역흑자를 내는 만큼 중국측 요구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 고통스럽겠지만 이제부터라도 함께 대책을 마련해나가자"고 발표했다면 지금 와서 한결 문제를 풀기가 수월하지 않았겠습니까 ?

지금 우리 경제는 대한생명·현대투신·하이닉스 처리를 하루바삐 매듭짓고, 갈수록 높아지는 무역장벽과 통상마찰에 대응해야 하는 등 중대 과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국민의 고통을 수반하지만, 더 미뤄서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진지한 노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국민임대주택 1백만호 건설▶자동차 특소세 연장▶신협출자금 예금보호대상 유지 등 다분히 '선심성'으로 비춰지는 시책들이 범람합니다.

이제 장밋빛 전망에 국민들이 좋아라고 박수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정부가 '빛 보는 일'보다는 '품 드는 일'에 매달릴 때 진정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요리'보다는 '설거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무원들이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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