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 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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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마리 곰과 용이 꽃놀이 나온 사람들에게 술을 팔러 나섰다. 잔돈으로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준비했다. 가는 길에 술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곰이 먼저 '돈만 내면 누가 마셔도 상관 없잖아'하며 10원을 용에게 건네고 한잔을 마셨다. 용도 질세라 곰에게서 받은 10원을 도로 주고 한잔 했다. 술통이 비도록 한잔, 두잔 하다 보니 기분은 최고였고, 술 판 돈도 두둑이 챙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과 용의 지갑에서 나온 돈은 10원짜리 하나였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료 신타로(笠信太郞)의 얘기다. 그는 1960년대 고도성장에 들떠 진정한 가치 창조보다는 외형 부풀리기에 열중하던 일본 경제를 구전동화를 빌려 '꽃놀이 술(花見酒)의 경제'라고 비판했다. 최근 일본경제신문은 신타로의 표현을 다시 빌려 미국경제가 꽃놀이 술에 취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최근 미국을 강타한 회계부정 파문은 꽃놀이 술에 다름 아니다. 회사들끼리 짜고 매출을 주고 받으면서 장부상으로만 외형과 이익을 부풀린 것이나, 회사 내부정보와 자금을 이용해서 경영진들이 주식을 팔거나 현찰을 챙겼다. 따지고 보면 곰과 용이 10원을 주고 받은 꽃놀이 술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무조건 공짜 술은 없다. 잔돈 10원조차 남아있지 않은 엔론·월드컴 등은 도산했다. 어리석은 용과 곰을 잡아내야 할 정부도 술을 나눠마셨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까지 회계부정·내부자거래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들의 비리 의혹을 추궁하고 있는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지난주말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기업 경영자들과 회계법인, 정치권력이 얽히고 설킨 내부자들의 농간이 미국 자본주의에 위기를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마셔버린 술값을 이제 미국이 대신 치르고 있다는 얘기다.

꽃놀이 술이 어찌 미국 뿐이겠는가. 그나마 미국은 술도 세고 술값도 두둑하다. 취해 널브러졌다가도 이내 되살아나는 복원력 역시 당대 제일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한국 역시 얼마 전까지 장부조작에 정경유착이 뒤얽혀 꽃놀이 술을 즐겼다. 그 술값이 이른바 'IMF사태'였다. 그후 5년이 흘렀지만 회계제도는 아직도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는데, 기업과 핵심 정부인사·대통령의 아들까지 얽힌 스캔들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다시 술값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를 판이다. 과연 우리는 꽃놀이 술을 끊은 것일까.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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