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어느 벤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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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롯데월드 예술단원 시절. 우리 단원들에게 뮤지컬에 대한 모든 걸 가르쳐 주려고 왔던 뉴욕 브로드웨이 선생님이 준 테이프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테이프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연습용이었음을 알았지만, 처음엔 아무 뜻도 모르면서 멜로디를 따라 부르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97년 여름. 모든 일을 접어두고 뮤지컬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로 유학을 꿈꾸었다. 귀로만 들었던 '미스 사이공'을 직접 보고,그들의 실력을 배우고 싶었다. 뮤지컬 배우로 일생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한 내게 브로드웨이는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최정원씨는 나이가 많은데다 아직 미혼이고, 프리랜서 배우네요. 이번 비자 심사에서는 안되겠어요."

내 삶에서 첫 번째 맛보는 좌절이었다. 참 서러웠다. 내 노력과는 무관한 이유로 비자 심사에서 탈락한 것이다. 서러움을 안고 미국 대사관을 나서니 입구에는 지금의 남편이(그 당시만 해도 그저 친한 친구였던) 연락도 없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반쯤은 안겨 펑펑 울었다. 그는 아무말도 없이 퉁퉁 부은 눈의 나를 차에 태우고 남산으로 향했다.

난생 처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본 평일 오전의 남산공원은 참 평화로웠다. 내 처지를 비웃는 듯했다. 그는 이런 마음 상태를 헤아려 분위기 있는 벤치에 날 눕히고 웃옷으로 덮어 주었다. 조금 전 서럽던 일을 까맣게 잊게 한 포근함. 나도 모르게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혼인 신고만이라도 할까요? 그럼 직장 있는 남편의 아내이니 10년 비자쯤은 우스울 텐데…."

한참을 자고 일어난 내게 곁에서 지켜주던 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멋쩍어 하자 그는 말을 돌렸다.

"1975년 4월. 베트남 사이공의 술집에서 킴과 크리스는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미스 사이공'에 대한 그의 작품 설명은 너무도 생생했다. 노래로만 그 작품을 '느껴왔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치 직접 현장에서 그 작품을 보는 듯했다.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뮤지컬이라는 예술을 하기에 앞서 그 작품을 느끼려면 남들과 다른 눈으로 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는, 어느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한 그의 말은 이제 모든 예술을 접할 때마다 되새기는 경구가 되었다.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은 이유는 정원씨가 뮤지컬을 더 많이 알고 나서 보란 뜻일 거예요. 그리고 나서 보면 감동이 더할 테니까요.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내가 도와 줄께요."

이듬해 그이와 결혼한 나는 그해 정말 10년 비자를 받게 됐다. 비자를 받던 날 '그날'을 되새기며 우린 남산 공원에 올랐었다. 그 남산과 그 이가 없었으면 내 뮤지컬 인생은 어땠을까. 나는 뮤지컬 배우의 기본을 깨우쳐준 그때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지금도 세살난 딸과 함께 남산 곁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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