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노믹스의 終章 쓰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선까지 아직도 5달 넘게 남았고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완연한 요즈음, 경제정책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 답안이 될 만한 일화 하나가 있다.

지난 5월 20일 오후, 청와대에선 김대중(大中)대통령 주재로 '중산층 육성 및 서민생활 향상 관련 관계장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6·13 지방선거를 20여일 앞두고 있던 때였다.

회의는 여느 때처럼 '대통령 말씀'에 앞서 전윤철(田允喆) 경제부총리의 발제와 사회로 장관들이 보고성 토론을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사전 각본'에 따라 잘 진행되던 회의는 행정자치부 장관 발언 순서에 가서 걸렸다.

애초 행자부는 별 현안이 없어 장관 발언이 잡히질 않았었는데, 그렇다고 그냥 앉아있을 수는 없다는 행자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그렇다면 '물가 안정' 대목에서 장관이 발언을 하기로 조정된 터였다.

田부총리가 '물가안정이 중요하니 지방자치단체들이 철저히 신경을 써줘야겠다'는 뜻으로 운을 뗐다. 이를 받아 행자부 장관은 '상수도요금 등 생활물가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이 때 예정에 없던 '대통령 말씀'이 나왔다.

"물값을 올릴 요인이 있으면 올려서 물을 좀 덜 쓰게 하고 그래야지 무조건 억제하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잠시 분위기가 머쓱해졌던 회의는 막판에 한 번 더 '각본'에서 크게 빗나갔다.

이날 농림부 소관 내용 중 핵심은 농업정책자금 금리 인하였다. 5%인 금리를 4%로 내리기로 재경부·경제수석실과 다 합의해 놓은 상태에서, 농림부 장관은 '인하 검토'까지만 발언하고 대통령이 4%로 내릴 것을 지시하게끔 되어있는 '말씀 자료'가 金대통령 앞에 놓여 있었다.

아, 그런데 金대통령이 4%에 대한 언급 없이 회의를 끝내려 하지 않는가.

당황한 참모진은 급히 메모 쪽지 한장을 金대통령에게 전달했고, 金대통령은 쪽지를 자세히 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금리를 내린다고 농어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금리란 낭비를 못하게 하는 기능도 있는 것인데, 지금도 여러가지 농어촌 정책자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가 굳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리 인하가 근본 대책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DJ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농수산 정책자금 금리는 예정대로 7월부터 4%로 내려갔으나, DJ는 이날 종전과는 사뭇 달랐다. 서민이나 농어민의 인기를 끄는 정책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는가.

만일 DJ가 이런 입장을 내내 지켜왔다면 국민의 정부 경제정책은 크게 달라졌을 부분이 꽤 있다.

농촌 정책은 처음부터 방향을 달리 잡았을 것이고, 각종 복지 대책을 내놓을 때는 더 신중했을 것이며, 인기영합주의라는 비판을 들을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인기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아무튼, 이 날 DJ는 경제정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말한 셈이다.

경제가 인기영합주의에 가장 취약한 때는 선거, 특히 대선을 앞둔 때다. 더도 말고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치렀던 대선을 생각해보라.

여야 모두 개혁 입법을 무산시켰고, 이회창·김대중 후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실기업인 기아자동차 공장을 찾아가 '국민의 기업' 존속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YS는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며 '말씀 자료'를 읽되 엉뚱한 장관을 보며 읽고, 환율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료대로 금리 대목을 읽었다던가.

경제엔 임기가 없다 -.

DJ의 말인데, 정말 그렇다.

이 말을 유권자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다.

경제엔 정권이 없다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