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德國

중앙일보

입력 2002.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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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옛날엔 독일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중국의 영향이 컸던 시대라 중국사람들의 표기를 그대로 썼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힘이 커지면서 독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인들이 '도이쓰'(ドイツ)를 차자(借字)한 '獨逸'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독일이란 표기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이유로 한때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음이 번거롭고 긴 도이칠란트 대신 독일이 일상적 표기로 자리잡았다.

한국과 독일의 첫 만남은 조선 인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하면서 베이징(北京)에서 활동 중이던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로부터 서양 과학과 천주교 서적, 성모상 등을 선물로 받았다. 바로 천주교가 전래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한·독 교류의 선구자는 고종 때 최초의 서양인 고문으로 활동했던 묄렌도르프다. 목인덕(穆麟德)으로 불렸던 그는 1882년부터 85년까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독우호통상조약 체결(1883)등 당시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했다.

한·독 교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미륵이다. 1920년 독일에 망명한 그는 46년 한국의 토속적인 정취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로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알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 소설은 최우수 독일어 소설로 선정될 정도로 현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이외에 전혜린·윤이상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인들에게 한국인의 이미지를 가장 분명하게, 그것도 긍정적으로 심어준 사람들은 60~70년대에 파견된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들이다. 이들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가며 번 돈을 고국에 송금, 외화가 귀하던 시절, 경제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 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이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조국이 가난해…"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전체가 부둥켜안고 울음바다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들이 독일사회에 보여준 근면·성실·친절은 지금까지 한국인의 이미지로 굳었다. 이들이야말로 한·독 교류사에 누구보다 큰 족적을 남긴 민간 외교사절이었다.

이들에게 엊그제 한·독전의 감회는 남달랐다. "30년 타향살이의 한은 이미 4강 진출 때 다 날려보냈다"며 뿌듯해하며 기울이는 이들의 맥주잔에는 그러나 못내 아쉬운 듯 눈물이 흘렀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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