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시인 키츠의 사랑과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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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누워 있노라." 폐결핵으로 요절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1795~1821)는 이국 땅에서 유일하게 그의 최후를 지켜준 친구에게 이런 묘비명을 부탁했다. 자신을 잊고 있는 듯한 고국 친지들에 대한 원망과, 비록 죽은 뒤에라도 공동묘지의 수많은 묘비들 중에서 세인들의 눈길을 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함께 담은 것이리라.

신간 『죽기 전 100일 동안』(원제 Darkling I Listen)은 요양차 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랑하던 여인을 그리며 이렇게 쓸쓸히 생을 마감한 키츠의 마지막 1백일을 담은 평전이다.

영문학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그이기에 생애나 문학작품을 다룬 책은 적지 않지만 사실 국내에는 대표적인 시집들조차 다 번역돼 있지 않다. 더군다나 키츠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본격적인 전기로서는 『죽기 전 100일 동안』이 국내에 소개되는 첫 책이다. 미국의 유명한 전기작가인 저자는 키츠의 편지 등 많은 자료들을 꼼꼼히 분석해 한 천재시인의 소설과도 같은 사랑과 죽음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의 삶과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약혼녀 패니 브론과, 마지막 간병인이었던 친구 조지프 세번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키츠의 극적인 러브 스토리는 브론이 과연 시인을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어 죽음에까지 몰고간 악녀였던가, 아니면 문학적 영감을 꽃피워준 선녀였던가 하는 오랜 영문학계의 논쟁을 다시 한번 짚어보게 해준다.

그리고 세번이 화가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영국을 떠나, 병마와 처절하게 투쟁하는 키츠에게 끝까지 위안을 주고자 했던 헌신적인 우정은 그대로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이룬다. 한 천재시인의 삶을 떠나 참된 우정과 인간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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