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오락가락'EU 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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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동안 중도좌파 세미나 같던 유럽연합(EU) 정상회담 분위기가 21일 열리는 스페인 세비야 회의부터는 좀 달라질 것 같다.

3년 전만 해도 15개 회원국 중 11개국에서 중도좌파가 집권할 만큼 EU는 한동안 좌파 일색이었다.

그러나 2000년을 기점으로 하나둘 줄어들더니 마침내 대표선수격인 프랑스 좌파마저 무너졌다. 이제 남은 건 독일·영국·스웨덴·그리스·핀란드 등 5개국 뿐이다. 독일의 적·녹 연정 역시 오는 9월 총선 때까지 시한부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유럽의 우경화(右傾化)로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인 듯 싶다. EU 전문가인 아르노 미게(경제학) 런던대 교수는 좌우 교대를 '시계추 효과'로 설명한다. 정치권에 만족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시계추처럼 좌파와 우파를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파정권도 취약하긴 좌파와 마찬가지"라고 단언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의 좌우 정권교체는 좌파의 위기라기보다 정치의 위기다.

실제 현대 유럽정치에서 좌우 구별은 거의 무의미하다. 영국 노동당을 이끌고 있는 토니 블레어 총리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에서 우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와 이견이 없다.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이끈 프랑스 좌파정부는 역대 어느 우파정부 못지 않게 기업 민영화에 앞장섰다.

유럽의 어느 중도좌파도 시장경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분배와 평등이 강조된 보다 발전된 형태의 자본주의를 주창하며 정치 전면에 나섰다.

하지만 우파가 그랬던 것처럼 좌파 역시 실패하고 실업과 생산성 저하 등 많은 문제를 남긴 채 퇴장하고 말았다.

유권자들은 우파에 다시 바통을 넘겼지만 그들이라고 시장만능(市場萬能)이 초래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유권자들도 그걸 알지만 대안이 없다.

차선적 좌우 교대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라는 후유증을 남긴다. 프랑스만 해도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 5명 중 2명이 투표장에 가지 않았다.

극우파를 비롯한 포퓰리스트들의 현실성 없는 주장에 많은 사람의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탄생하지 않는 한 오늘날의 정치위기가 치유되기 어렵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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