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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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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남 순천시 영동에는 팔마비(八馬碑)라는 고려시대 비석이 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76호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비석에 얽힌 얘기는 이렇다. 고려 충렬왕 때 이곳을 다스리던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다가 떠나게 되자 관례대로 백성들이 말 7마리를 선물했다. 최석은 폐습(弊習)이라며 도중에 낳은 망아지까지 합해 말 여덟 필을 되돌려 보냈다. 이를 계기로 헌마(獻馬) 폐습이 없어지게 되자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고 팔마비라고 불렀다. 지방 수령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의 효시(嚆矢)다.

조선시대엔 팔도 골골에 송덕비가 많았다. 고을 수령이 갈리면 으레 세워지곤 했다. 부정한 수령이 자신의 청렴을 위장하려고 백성들을 시켜 억지로 세우는 경우도 적잖았다. 수탈을 일삼던 수령이 덕을 기린다는 비까지 세웠으니 백성들에겐 송덕비가 원한의 표적으로 여겨졌을 법하다. 재를 뿌리거나 똥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탐관오리의 송덕비로는 과천 현감의 것이 유명하다. 과천 현감이 이임하는 날 송덕비를 제막했더니 비면(碑面)에 ‘금일송차도(今日送此盜·오늘 이 도둑을 보낸다)’라고 쓰여 있더란다. 그걸 본 현감이 옆에 덧붙인 게 걸작이다. ‘명일래타도(明日來他盜·내일이면 또 다른 도둑이 오리니), 차도래부진(此盜來不盡·이 도둑은 끊임없이 온다)’.

민초(民草)들이 정성을 모아 지방관의 공덕을 기린 진정한 송덕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토정 이지함은 선조 때 아산 현감을 지냈다. 토정이 가장 먼저 만든 게 걸인청(乞人廳)이다. 거지들을 수용해 일을 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헐벗은 백성을 따뜻이 보살피는 게 수령의 본분이요, 책무라는 신념에서다. 백성들이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음은 물론이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사무소 앞뜰에 있는 영모비(永慕碑)가 그것이다.

서울 동작문화원이 지난달 30일 퇴임한 전 동작구청장의 공적을 새긴 비를 세워 때아닌 ‘송덕비’ 논란이 한창이다. 주민 모두가 뜻을 모아 세운 것이라면 탓할 바 아니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는 주민이 많은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다. 민선 5기 지방정부가 이제 막 출범했다. 피와 땀을 다해 선정을 베풀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지 말란 법이 없다. 두고두고 존경받는 시장·군수가 넘쳐나 진정한 현대판 송덕비가 전국 곳곳에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