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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사육 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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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련하기 곰 같다고 하지만, 모르는 얘기다. 때맞춰 연어의 길목을 지키는 슬기로움, 민첩하게 움켜쥐는 모습엔 그저 탄성만 나온다. 벌통에서 꿀을 따는 지혜는 어떤가. 서커스에서 조련사는 곰에겐 사자나 호랑이와 달리 채찍을 안 쓴단다. 먹이로 달래면 알아듣는 것이다. 나름대로 영민한 동물이다.

그래선가. 인간은 예부터 곰과 친했다. 우선 크기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특히 곰이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내저으며 포효하는 모습에서는 직립(直立)의 동질감도 느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 곰을 조상 혹은 자손으로 노래하는 설화가 많은 이유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대표적이다. 아메리카 체로키 인디언의 조상도 곰이고, 북부 러시아에도 이런 유의 민담이 많다. 하지만 서로 닮았다는 착각이 서로에게 고통을 안기는가.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는 ‘곰과 인간의 역사’에서 “모든 악연(惡緣)은 곰을 인간과 동일시하면서 싹텄다”고 했다. 그는 “인간은 곰을 받들다 죽였고, 어르다 괴롭혔고, 보살피다 먹었고, 존중하면서 멸시했다”고 설파했다. 친구가 곧 적(敵)인 셈이다. 인간세계처럼.

맞는 말이다. 어쩌면 그 반대로 지구상 모든 생물에게 인간이 적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요원 스미스를 통해 뇌까린다. “인간은 포유류가 아니야. 모든 포유류는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그런데 인간은 자연자원을 모두 소모해. 그러곤 옮겨가지. 바이러스처럼.” 그러면서 인간이 ‘질병’이라고 일갈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곰은 더 슬프다. 건국의 어머니가 웅녀(熊女) 아닌가. 한데 공존은커녕 쓸개만 탐한다. 공작은 아름다운 깃털,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다. 곰은 바람에 말린 쓸개-웅담 때문이다. 급성질환과 소아병에 특효란다. 야생동물에게 동의보감은 살생부(殺生簿)다. 세계에서 곰을 죽이기 위해 키우는 나라가 두 곳, 한국과 중국이다. 그나마 한국에선 발바닥이라도 성할까. 현재 전국 농가에서 웅담을 얻으려 사육하는 일반 곰이 1400여 마리라고 한다. 이에 녹색연합이 9일부터 곰 사육 폐지 특별법 제정운동에 나선다. 국제적 멸종위기종인데, 부끄러운 사육을 폐지하자는 것이다.

이럴 때 곰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리산에 풀어주지도, 태어난 동남아로 보내주지도 않을 것 같다. 혹시라도 앞일을 모르니, 쓸개라도 빼 주고 자손을 퍼뜨릴까. 아니면 야생의 자유 없는 속박의 굴레를 ‘절멸(絶滅)’로 벗을까. 곰도, 인간도 어려운 선택이다.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