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선거도 좀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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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시민의식이 성숙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도 질서를 지키고, 외국팀과 그 응원단에 대해서도 존중·격려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젠 한국의 명물이 된 거리응원전에서 보인 시민의식은 놀랍다. 지난주 폴란드와의 경기 때엔 서울 도심에서 수십만명의 인파가 열광적인 응원을 했지만 단 한 건의 사건·사고도 신고된 바가 없었다고 한다. 게임이 끝난 후엔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해 그 많은 인파가 휩쓸고 간 거리답지 않게 뒷자리도 깨끗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외국 언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우리 모두 어깨가 으쓱할 만도 하다.

그러나 정말 우리의 시민의식이 그렇게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월드컵에서 보면 그렇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러나 월드컵과 함께 치르고 있는 지방선거를 보면 국민의 의식수준이 더 높아졌는지 낮아졌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라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같은 국민인데 월드컵에서는 높은 수준을 보이고 선거에서는 낮은 수준을 보인다면 그 시민의식은 성숙한 것인가, 아닌가.

축구에만 성숙한 시민?

물론 공부 잘 하는 학생도 유독 약한 과목이 있다. 국어·수학은 잘 하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이 있고, 다른 과목은 다 우수한데 유독 예능을 잘 못하는 학생도 있다. 그럼 우리 국민은 월드컵이라는 과목은 잘 하는데 선거라는 과목은 잘 못하는 국민인가. 과목별로 성적이 들쭉날쭉한 학생처럼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것도 어느 분야에서는 발휘되고 어느 분야에서는 발휘되지 않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을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월드컵에 밀려도 너무 밀리고 있다. 선거가 이틀 앞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도무지 관심이 일지 않는다. 사상 최악의 투표율이 우려되는 가운데 후보자를 알아볼 거의 유일한 자료인 선거공보가 뜯기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수북하다는 것이다. 자기를 알리고 선전할 방법이 없다는 후보자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월드컵과 선거가 상호배척의 관계일 수는 없다. 월드컵을 잘 하면 선거를 잘 못하고, 선거를 잘 하면 월드컵을 잘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두가지 다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월드컵 때문에 선거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다. 양쪽에 다 필요한 성숙한 시민의식이 한쪽에서만 발휘되고 다른 쪽에선 발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 성숙한 시민이라면 월드컵에서만 성숙하고 선거에선 미숙할 리가 없다.

국민의 선거무관심은 정치 탓이라는 말은 물론 맞다. 정치에 실망하고 식상하고 분노하고 경멸하다 보니 정치판·선거판은 꼴도 보기 싫다는 심정이 될 수도 있다. 또 투표해봐야 그 ×이 그 ×이라고 체념·포기하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정치판을 누가 만들었나. 누가 그들을 대통령·국회의원·시장·도지사·군수·시의원으로 뽑아 그런 정치판을 만들도록 했는가. 선거 때마다 나쁜 정치가 싫어서 선거를 외면한다면 나쁜 정치는 누가 언제 고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땅에 사는 한 그 나쁜 정치를 떠나 살 수가 있는가.

정치에서 국민은 항상 죄가 없고 항상 상전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정치는 결국 국민의 책임이요, 국민이 그 업보를 받게 마련이다.

투표 않으면 '厚黑系'득세

이번 지방선거도 이렇게 무관심으로 팽개친다면 거기서 오는 재앙은 결국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투표율이 낮아 주민의 반(半)의 반도 안되는 표로 당선되는 시장·군수라면 그들에게 무슨 정책추진력이 있겠으며 최소한의 주민존경인들 받겠는가. 투표율이 낮을수록 '득표기술'이 힘을 쓸 텐데 득표기술이라면 수단 방법을 안가리는 얼굴 두껍고 뱃속 검은 후흑계(厚黑系)들이 가장 잘 하는 짓 아닌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뽑힌 광역단체장 16명 중 5명이, 기초단체장 2백32명 중 54명이 형사피의자가 됐다고 한다. 이번에 다시 후흑계가 대거 득세한다면 지방행정이 엉망이 되고 각종 부패로 다시 줄줄이 구속되는 일이 되풀이될 게 뻔하다.

이제 불과 이틀 남았다. 월드컵은 월드컵대로 계속 열심히 하자. 그리고 이젠 선거도 좀 챙기자. 월드컵에서 보여준 열정·질서의식·책임감을 선거에서도 보여주자. 그래야 성숙한 시민이다. 선거를 팽개치는 국민을 향해 성숙한 시민이라고 한다면 그건 아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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