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패밀리' 신선한 코미디 변주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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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8면

지난 주말, 밤 11시50분 시작해 3편을 밤 새워 상영하는 심야극장을 찾았습니다. TV의 월드컵 축구 중계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뒤늦게 일어나니 남은 수단이라곤 그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뜨겁던 한밤의 영화관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당초 관람 스케줄에서 빼뒀던 '묻지마 패밀리'를 만났습니다.

그 영화를 외면하려 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올 들어, 정확히는 지난해 말부터 우리의 코믹 영화에 실망을 거듭했습니다. 관객의 억지 웃음으로 내모는 가학성(加虐性)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편이 옳을지 모릅니다. 제목을 한번 보십시오. '묻지마 패밀리'-. '묻지마 관광'만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지레 영화를 평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나 봅니다.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묻지마…'는 최근의 다른 코믹 영화와는 달랐습니다. 우선 상영 시간 30분 남짓의 중편 3개를 옴니버스 형식(제작사의 말로는 단편 3개를 묶은 '섹션 코미디')으로 배치한 실험성이 새로웠습니다. 게다가 연극의 커튼 콜(등장 인물을 무대로 다시 불러내는 것)방식을 차용한 영화의 엔딩도 신선했습니다.

영화는 '사방에 적'(감독 박상원) '내 나이키'(감독 박광현) '교회 누나'(감독 이현종)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방에 적'은 러브호텔 8층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사연을 코믹 액션으로 꾸민 것입니다. '내 나이키'는 멋진 운동화를 갖고 싶어하는 중학생을 성장 스토리로 담았습니다. '교회 누나'는 한 이등병의 러브 스토리를 뮤지 비디오처럼 그린 멜로입니다.

세 편의 영화는 유기적 연결 고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따로 노는 것도 아닙니다. 앞 영화에 나왔던 배우를 나중 영화에 다른 캐릭터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큰 맥을 살려나갑니다. 예컨대 '내 나이키'에서 "언제까지 노력만 할래"라고 핀잔을 듣던 임원희는 '교회 누나'에서 영화관에 앉아 손전등으로 책을 비추며 공부를 해 결국 국회의원 후보로 벽보에 나붙습니다. 바로 제작자가 일부러 설정한 이미지의 혼란입니다.

큭큭 소리를 연발하며 '포스트 모던한 웃음'의 의미를 떠올렸습니다. 나이키 신발에 온 정신을 빼앗긴 중학생 명진에게 밤 하늘의 초승달도, 하늘의 구름도 나이키의 상표처럼 비쳐집니다. 군데군데서 CF를 찍던 박광현 감독의 발랄함이 살아 움직입니다. '교회 누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기차가 떠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구실로 두 사람은 용기를 냅니다. 이등병 영일과 이미 결혼한 옛 교회 누나 주희는 차창을 사이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거죠. 그러나 두 사람은 "기차는 종착역에 닿은 것"이라는 역무원의 안내방송 소리에 머쓱해지고 맙니다. 다시 큭큭-.

이번 영화를 제작한 종합 문화창작 집단 '필름있수다'의 장진 대표는 이 영화를 '단편영화의 상업적 흥행에 도전하는 작품'이라 규정합니다. 장르의 칸막이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문화행위를 하려는 '필름있수다'의 이념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정작 본격 단편영화 제작자들은 '묻지마…'를 '단편영화의 유한 계급'으로 치부하는 듯합니다.

유명 배우이자 '필름있수다'멤버인 신하균·정재영·임원희 등을 개런티 없이 캐스팅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른 단편영화에선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필름있수다'의 포스트 모던한 실험은 그래서 이제 시작일지 모릅니다.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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