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판·검사가 성폭행 피해 아동을 이해한다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9살·10살 자매를 9개월간 성추행한 노모(60)씨에게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선고됐다는 본지 보도(7월 3일자 1면)를 본 한 독자로부터 온 e-메일 내용이다. 미국에서 아동 심리치료사로 일하는 민성원(아동심리학 박사)씨였다. 그는 성폭행 피해자에게 국가가 수백억원을 배상하는 미국과 대비되는 한국 상황에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한국의 판·검사님들이 성폭행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아동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다.

민씨는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크면 자신이 당한 일도 부인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판·검사가 아니라 자격증을 가진 심리 전문가가 아동을 상담하고 조사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민씨의 주장이 기자의 가슴에 와닿은 이유는 노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뒤 사건 현장에 사는 주민들의 불안감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노씨가 석방돼 돌아 온 서울 은평구의 동네에서 만난 한 주민은 “불안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했다. “피해 아이들의 부모도 이사를 하려다가 ‘가해자는 적어도 3년 이상은 징역을 살 것’이라고 한 검사의 말에 아직 이사를 안 했다”고 전했다. 그는 노씨가 몇 년 전에도 피해 자매와 비슷한 또래의 ‘수퍼마켓 집 딸’을 추행한 적이 있다고 했다. 수퍼마켓 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 동네에서 노씨는 ‘나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은 노씨가 여자 아이들이나 여성들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염려했다. 무죄가 선고된 이유인 ‘심신 상실에 따른 판단 능력이 없는 상태’는 그의 이웃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피해를 당한 은비(9·가명)·금비(10·가명) 자매도 언제든 노씨와 다시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다. 법원 측은 본지 보도에 대해 “노씨 가족과 국선변호인이 ‘노씨를 보호시설에 입소시킨다’는 서약서를 낸 점을 판결에 고려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강제력 없는 문건이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선 성범죄자를 석방한 뒤 발생한 2차 피해도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럼, 한국에선?

정선언 사회부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