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택만 누리는 이민자에 실망, 관대하던 정책 깐깐해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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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22면

프랑스 이민자들과 민간단체 회원들이 2006년 차별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달 21일 프랑스 파리 북역의 유로스타 대합실 앞의 여권 심사 창구.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디에 머물 건가” 등의 영국 이민국 직원의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올해 들어서만 네 번째 영국 런던으로 가는 유로스타 탑승이었지만 이처럼 꼬치꼬치 ‘추궁’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해저터널을 이용해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는 고속철도인 유로스타는 파리의 출발지인 북역에서는 영국의 이민국 직원이, 런던의 세인트 팬크래스역에서는 프랑스 이민국 직원이 여권 심사를 한다.

이민 보는 눈 달라진 '이민자 천국'유럽

이전의 런던 출장 때는 의례적으로 가는 이유와 돌아오는 날 정도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런던에서 만날 사람이 보낸 e-메일까지 보여줬더니 그제야 “좋은 여행이 돼라”는 말과 함께 여권에 입국허가 도장을 찍었다.

다음 날 파리로 돌아오기 위해 런던의 세인트 팬크래스역에 갔을 때는 아랍계 일가족으로 보이는 승객들과 프랑스 이민국 직원이 승강이를 벌이는 것을 목격했다. 동반한 어린이들에게 ‘여행허가증’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 듯했다. 가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과 이민국 직원이 언성을 높였다. 이민국 직원은 그가 내민 여권과 체류허가증을 구석구석 살피더니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이들을 통과시켰다.

비유럽인이 유럽에서 사는 일이 힘들어지고 있다. 곱지 않은 시선이 늘고, 체류 허가 절차도 까다로워졌다. 영주권 획득도 더욱 어려워졌고, 한번 얻은 영주권이 박탈되는 경우도 있다. 보편적 인류애와 인권이 보장되고, 체류 허가만 얻으면 온갖 사회보장의 혜택을 누리는 ‘이민자의 천국’이라는 말은 이미 옛 얘기가 됐다.

유럽의 반이민, 반이민자 정책들
영국 정부는 지난달 말 유럽연합(EU) 이외의 지역에서 오는 이민자 수를 한 해에 2만41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전달에는 영국인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입국하는 결혼 이민자들에게 영어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영어 못하는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 등의 비판도 있었지만 영국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프랑스는 올해 초부터 영주권을 대신하는 10년 체류허가증을 받은 거주자들에 대한 체류 심사를 강화해 이들 중 상당수에게 1년짜리 체류허가증을 내주고 있다. 기존에는 다시 10년짜리 허가증을 내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민 심사 때의 준법 교육도 강화됐다.

최근 네덜란드ㆍ영국ㆍ오스트리아ㆍ프랑스 등의 선거에서는 인종 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극우 정당들의 득표율이 올랐다. 이들은 이민자 때문에 자국민이 일자리를 잃고 있으며, 치안 비용이 늘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해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흉흉해진 민심을 파고든 것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원성이 높다. 거주국의 규범과 전통에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배타적 사회를 이루면서 복지 혜택은 다 누린다는 것이다. 이슬람권 출신이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프랑스의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은 이슬람 신자의 이민을 전면적으로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는 그동안의 관대한 이민 정책을 외국인들이 악용해왔다는 여론도 널리 퍼져있다.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일부다처 관습을 인정해 여러 명의 부인을 동반 이민자로 받아들였더니 일부 이민자가 돈을 받고 가짜 부인들을 입국시킨 사례들이 나타났다. 프랑스의 일부 지역 이민 당국은 최근 체류 심사 때 배우자는 한 명만 두겠다는 서약서를 받기 시작했다.

“우등 이민자 한국인, 공동체에 관심 보여야”
유럽의 반이민자 정서 확산에는 이민자나 장기 체류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민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존중하지 않거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이슬람 이민자들을 겨냥한 것이지만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아인들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런던의 대표적 한인 밀집 지역인 뉴몰든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에드워드 데이비(45ㆍ자유민주당) 영국 하원의원은 “한국계 주민들은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 ‘우등생’ 이웃이지만 지역 사회와의 교류와 화합에는 소극적인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영국 총선과 함께 치러진 지방의회 선거에서 킹스턴시 시의원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한국계 교민 권석하(59)씨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만난 영국인들은 한국계 주민들이 자신의 집 대문 안에서 폐쇄적으로 살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며 “영원한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마음의 담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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