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문화·사회 단칼에 해부 『축소지향의 일본인』 지적 호기심 만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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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범죄학을 공부하는 예비 경찰인 젊은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사회학을 다룬 『여기에선 저 일본이 신기루처럼 보인다』(열음사)라는 책을 쓰게 된 데에는 많은 사연이 있다. 그 시작은 예전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던 만화 '은하철도 999''천년 여왕'을 보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텔레비전 앞에 앉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품었던 의문은 작중에 수시로 등장하는 포장마차 우동집이었다. "이야, 은연중에 문화적으로 침투하려는 고도의 술수를 쓰는구나."

10대였던 나는 일본 만화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에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나라 중산층은 그야말로 일본에 대해서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퇴폐 왜색문화에 대한 궐기가 주기적으로 있었지만 일본 제품에 대해서는 정신 못차리는 호의를 가졌으니 말이다.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노래방과 비디오방이 세력을 형성하고, 일본에서 유행한 것은 5년 이내에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던 시절. "그러면 일본 사회를 연구하면 몇 년 후 한국 사회의 흐름이나 범죄양상에 대해서도 추론이 가능하겠군" 하며 일본 관련 서적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책들 속에서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진짜로 실현시킨 책이었다.

사람이 미친 것인지, 세상이 병들었는지에 대한 나의 결론에 종지부를 찍는데 도움을 준 책은 대중문화 평론가 김지룡씨가 쓴 『인생 망가져도 고!』(글로리아)와 연세대 이훈구(심리학) 교수가 K대생 부모 토막 살해사건을 파헤친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자음과모음)였다. 이런 책들이 일본 애니메이션과 무슨 관계냐고? 일본의 아이들이 아니메 붐 속에서 꿈나라와 안식처를 찾았듯이, 대한민국 아이들은 PC통신과 인터넷 붐 속에서 꿈나라와 안식처를 찾았다.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요, 더 나아가 게임과 인터넷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이 미쳤더라도 그런 세상이나마 연구하고 지켜보자는 것이 나의 전공분야인 범죄학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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