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4> 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 : 43. 전재산 교회에 헌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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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아내와 나는 지금 수원시 팔달구 원천동에 위치한 중앙기독초등학교의 관사에서 월세 40만원을 내고 살고 있다. 다세대주택인 관사에는 모두 6가구가 살고 있다. 우리 부부는 2층에, 요셉 가족은 1층에 살고 있다. 나머지는 교사들의 가족이다. 중앙기독초등학교는 초창기 세계기독봉사회에서 보내준 선교자금이 모태가 되어 1994년에 설립됐다.

나를 선교사로 한국으로 파송한 뒤 왈도 예거장로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실업인들과 힘을 합쳐 매달 선교비를 보내주었다. 그는 모금한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한국으로 보내려고 사무원을 두지 않고 부인과 둘이서 밤늦게까지 사무를 보곤했다.

나는 그때 보내온 선교자금으로 구입한 수원시 인계동의 1천2백평 땅에 집을 짓고 30년간 살았다. 학교를 지을 생각으로 집 앞의 논밭 5천평도 사두었다.

트리니티신학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요셉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음은 있었지만 방송사 일과 해외선교로 바빴던 나는 요셉에게 그 일을 맡겼다. 평당 30원을 주고 산 집터는 평당 3백만원으로 올랐고, 공원부지로 묶여있던 논밭은 평당 40만원으로 올랐다. 땅은 SK에 팔고, 기독회관 건물은 우리 교회에 팔았다. 여기에 내가 가진 약간의 땅과 방송사에서 당겨받은 퇴직금 1억원, 수원 영통지구에 있던 아버지 산소를 용인으로 옮기면서 생긴 2억원을 합치니 65억원이 되었다.

학교를 지으려면 땅값과 건축비를 합쳐 1백억원이 필요했다. 나는 당시 건축비가 모자라 은행에서 4억원을 대출받으려던 요셉에게 65억원이 생겼으니 교회에 십일조 헌금 6억5천만원을 바치라고 했다.

"내 학교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 일 하는 겁니다. 헌금은 하나님 일 하는 데 쓰는 거 아닙니까. 기독교 학교인데 왜 헌금을 합니까."

요셉의 항의에 나는 "십일조 안 하면 축복 못 받아"라고 잘라 말했다. 결국 요셉은 6억5천만원을 교회에 헌금했다.

1991년에 인계동 땅을 팔고 학교를 짓는 2년6개월 동안 우리는 기독회관 관리집사가 살던 10평이 채 안 되는 집에서 살았다. 요셉의 가족들은 유치원 교사들이 살던 2층 원룸 두 개를 터서 사용했다. 학교를 다 지었을 때 20억원 정도 빚이 있었으나 5년에 걸쳐 다 갚았다. 모든 재산을 헌납한 나는 중앙기독초등학교를 법인으로 등록했다. 학교에 대한 아무런 소유 권한도 갖지 않은 우리 부자에겐 현재 재산이 한 푼도 없다.

94년 중앙기독초등학교를 완공했을 때 당시 이영덕 총리가 참석하여 축사를 해주었다. 이총리가 명지대학교 총장 시절에 미리 축사를 부탁해두었는데, 학교를 짓는 사이에 총리에 올랐던 것이다. 초등학교 준공식에 총리가 참석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당시 이영덕 총리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준공식에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두 아들은 교회 건물을 짓지 않고 공간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요셉은 중앙기독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요한은 대전 YMCA 건물에서 예배드린다. 요셉이 담임하고 있는 원천교회는 중앙기독초등학교에 매년 1억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는 자폐아를 비롯한 45명의 정신 지체아들이 일반 학생과 함께 어울려 교육을 받고 있다. 아내는 학교 2층의 한 귀퉁이에 'Trudy's Pie Shop'이라는 빵가게를 운영해 그 수익금으로 장애아동 교육비를 지원하고 있다.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교사를 채용하는 등 비용이 많이 들지만 장애 아동에게는 학비를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내가 앞치마를 두르고 빵 만드는 모습을 보고는 많은 감동을 받는다. 아내는 멋있는 옷을 입고 '사모님'대우를 받으며 나들이를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 부부동반 모임이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나는 "이렇고 이런 모임이니 반드시 가야 한다"며 아내를 설득해야 한다.

우리 세대의 남자들은 가정보다 사회생활이 우선이었다. 유학 시절, 미국인들이 여가 시간을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눈여겨본 나는 바쁜 가운데서도 가능하면 가족과 함께 하려고 애썼다. 자녀들이 미국에서 공부할 동안에도 크리스마스 때면 우리 부부는 교회를 비우고 어김없이 미국에 가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어떻게 목사가 중요한 날 교회를 비울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담임목사는 바꾸면 되지만, 내 자녀들이 잘못되었을 때 아무도 대신 울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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