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 축구와 여가산업-축구, 레저산업 대중화에 크게 기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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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전통적 의미에서 산업이란 공장체계에 기반을 둔 공산품의 생산을 의미했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면서 산업이라는 개념은 다른 분야로 확장된다. 관광산업·스포츠산업·레저산업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오락과 여가의 분야가 굴뚝 없는 산업으로 인식되면서 돈벌이 수단이 된 것이다.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오락의 대중화와 상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70년 무렵이었다. 일반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과 여가시간의 증대가 레저의 대중화를 초래하고,그것과 때를 같이해 다양한 '매스 레저' 산업이 탄생한다.

특히 19세기 중엽 일기 시작한 스포츠 열기는 사회적으로 급속히 확산한다. 이때 가장 조직적인 변화를 이룩하고,스포츠의 상업화와 프로화의 기수로 등장한 것이 축구였다. 비록 골프·크리켓·테니스·럭비풋볼과 같은 특정한 종목들이 중산계급의 스포츠로서 절대적인 지위를 유지했지만,대중적 성격을 지닌 팀 스포츠로서는 축구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근대 축구가 탄생하기 이전에 행해졌던 민중오락으로서의 풋볼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규격화한 형식이 없었고, 또 지극히 난폭한 것이었다. 때문에 경기 당일 마을 전체가 소란해지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중세로부터 넓게 행해지던 민중오락으로서의 풋볼은 19세기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점차 사라지고, 단지 영국의 사립 중등학교에서만 존속되고 있었다.풋볼은 학교교육 속에서 서서히 난폭성을 배제하고,법칙의 성문화(成文化)나 교내 대항전 형식의 정비를 통해 공통규칙을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6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생들 사이에서 정해진 '케임브리지 룰'이다. 케임브리지 룰은 공을 손으로 다뤄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때부터 풋볼은 럭비풋볼과 사커의 두 가지 형태로 명확히 구분됐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즐기는 근대 축구가 탄생한 것이다.

축구가 대중화함에 따라 중요한 두 가지 사회현상이 일어난다. 그 하나는 관중이 등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화 경향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맺으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관중 수의 증대는 프로화를 촉진한다. 입장료 수입이 늘어나는데 따른 재정의 증가 때문이다. 경기는 프로화하면서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사회경제적인 힘을 얻어간다. 예컨대 정규 리그의 탄생, 팬 클럽의 형성, 관전료의 도입 등이 이뤄지고, 특히 관중 수가 증대함에 따라 지역민의 열렬한 성원과 지지를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무렵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축구는 생활의 일부가 된다. 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그들에게,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고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됐고, 생활의 큰 활력이 됐다. 일간지와 라디오의 보급에 따라 축구에 관한 소식은 보편적 관심사가 됐고, 관련 시장은 더욱 커졌다. 축구 소식을 모르면 일상 대화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다.

축구 팬들의 연대감은 마치 부족사회의 연대감과 같았다. 각 중소도시와 대도시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팀을 성원하면서 굳건한 지역 연대의식을 갖게 됐다.

축구의 대중화에 힘입어 이와 관련한 새로운 사업들이 번창하기 시작한다. 축구 서적·전문잡지·만화 등이 불티나게 팔리고,경기를 이용한 도박이 성행한다. 축구 복권을 주관하는 사업체는 엄청나게 큰 돈을 벌게 되고,정부조차 여기서 파생하는 간접적 수입을 노렸다.

이와 같은 영국 내부에서의 축구 대중화는 필연적으로 축구 국제화의 길을 열게 된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무렵에 영국 식민지의 인구는 이미 약 4억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는 제국주의란 이데올로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포츠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 축구가 국제경기로 개최되는 경우란 프로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하지 않는 올림픽대회 뿐이었다. 1896년에 축구는 아테네 올림픽의 번외경기로 참여해 12년 후인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진정한 축구의 세계 챔피언을 가리자면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겨뤄야 하며, 그러려면 아마추어 선수들만 출전 자격이 있는 올림픽 대회로부터 독립한 별도의 축구대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 결과 1930년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가 개최된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이벤트로서의 문을 활짝 열게 된 것이다. 축구의 대중화와 상업화 현상은 단순히 이윤 추구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즐거움과 쾌락이라는 감정의 세계, 즉 일반 대중의 욕구의 세계에까지 상업성이 깊숙이 침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가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의해 조종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사회에 들어서의 일이다. 일반 대중의 보편적 호기심을 자극해 한 덩어리로 묶어진 공통된 담론의 장을 엮어내면서 거대한 시장이 개척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스포츠의 프로화와 월드컵의 탄생에서 대표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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