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흔들리는 늙은 富國> 제조업은 끄떡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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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세계적인 카메라 제조업체 캐논 공장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없다.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맡은 일만 하던 방식을 1998년 싹 바꿨다.이른바 셀(Cell)방식.5명이 한조로 여러 공정을 맡아 책임지고 제품을 만든다. 작업공간은 54만㎡ 줄어 공장 5~6개를 새로 짓는 효과가 났다. 부품 및 제품 재고도 줄었다. 공장 운전비용을 3분의 1로 줄이는 등 지난해까지 4년 동안 1천2백억엔의 비용을 절감했다.

"PC·타이프라이터 등 7개 적자 사업을 정리하면서 그 쪽에서 일하던 사람을 다른 데로 돌리고 종신고용제는 유지했다. 다들 즐겁게 일한다."(야노 분지 홍보부 부부장)

잉크스는 정보기술(IT)을 제조업에 접목한 대표적 기업이다. 금형 제조업체가 만들려는 물건의 데이터를 전송하면 이를 받아 컴퓨터로 설계해 시제품을 만든다. 거의 모든 공정을 디지털화했다. 다른 데서 한달 걸리는 것을 4일이면 해낸다. 미국 크라이슬러자동차 본사 건물의 현관 문 설계를 맡아 했다.

'제조업 초강국' 일본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기업 도산이 늘었지만 몇몇 은행과 증권사·소매·건설업체가 그렇지,제조업은 건재하다."

일본의 미국에 대한 수출이 수입의 두배에 가깝고, 세계 1위 무역흑자와 외환보유액도 다 제조업 덕분이다. 지난달 말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평가에서 종합적인 국가경쟁력은 30위로 밀렸다. 하지만 특허권수·연구개발투자는 부동의 1위다.

"혼다의 엔진 기술, 소니의 마이크로 기술,캐논의 광전자 기술, 교세라의 뉴세라믹 기술은 다른 나라가 따라오기 힘든 핵심 기술이다."(마키노 노부루 미쓰비시종합연구소 특별고문)

소니 하면 워크맨을 떠올린다. 지난해부터 튀는 감각의 새로운 워크맨 CD플레이어를 내놓았다. 이름도 'PSYC(사이크)''Sports(스포츠)''Liv(리브)'등 톡톡 튄다.가격보다 디자인과 브랜드로 젊은층을 공략했다. 전략은 먹혀들었다. 지난해 다른 일본 전자업체가 모두 적자를 냈는데, 소니 혼자 1백53억엔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런 기업을 포함한 30개의 잘 나가는 대기업이 일본의 연간 수출액 51조엔 가운데 절반을 차지한다. 대형 제조업체만 경쟁력이 있는 게 아니다. 작지만 강한 일본 기업이 수두룩하다.

99년 옛 통산성 산업구조심의회가 자본금 20억엔 미만, 매출액 5백억엔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세계 시장점유율 1위인 일본 기업이 자그만치 5백48개였다.

테후코 아오모리는 손목시계 문자판 제작공정을 10분에서 5초로 줄였다. 시계판 숫자를 하나 하나 금형으로 만들지 않고 실처럼 한꺼번에 붙이는 방식을 개발했다.도호쿠 공조관리는 활성화산소 발생 장치를 개발해 금붕어 양식장에 성장촉진 장치로 판다. 두 회사 모두 세계시장 점유율 1백%다.

"경쟁자나 세무서를 의식해 선정 대상에서 빼달라는 우량 기업이 많았다. 당시 통산성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을 1천5백개로 봤다. 99년 이후 쓰러진 중소기업을 감안해도 아직 1천개는 남아 있다."(마노 히로타카 산업입지연구소장)

과거의 제조업 신화에 기대기만 해선 안된다는 경계론도 있다.

"80년대부터 조금씩 나타난 산업경쟁력의 문제점이 90년대 들어 일시에 드러났다.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산업의 문제점이 노출됐다."(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장관)

4월 초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소니를 추월하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삼성 쇼크'라고 부르며 삼성전자의 성장이 무섭다고들 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한국이 앞서거나 수위를 다투는 것은 기업으로 보면 삼성전자·포스코·현대중공업 정도고,산업으론 D램·조선·철강 정도다.

일본은 지금 새로운 산업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른바 'T산업'을 정부가 주도해 산학협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지놈(유전자복제)은 미국에 뒤진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생명공학(BT)·나노기술(NT)·연료전지·환경(폐기물처리)·교통통제시스템 분야는 벌써 싹이 움트고 있다.

"그동안 IT·NT·BT에 대한 투자를 상당히 했다.중국이 따라오기 어렵다."(고바야시 요시아키 게이오대 교수)

'좋아지면 모든 게 감춰지고 내리막엔 없던 문제도 생긴다'는 말이 있듯 오늘도 일본은 제조업을 통한 경제 회생에 기대를 걸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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