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탈출 꿈꾸는'현대인 원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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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1999년 심사위원들 전원의 극찬을 받고 발표 예정일 6일이나 앞서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는 후광 효과에 이끌려 이 소설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내심 '예상 밖의 실망''평론가들이 추천하면 재미없다''프랑스 소설 특유의 현학성' 등의 편견을 확인할까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시간 대비 재미 수익률과 재미 대비 반성 효과 면에서 영화는 이 소설을 따라오지 못한다.

"난 가야겠어, 이 집을 떠난다고"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 남자의 일상 탈출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하면 그게 어디 일상이랴? 이런 궁리 저런 공상을 해봐도 뻔히 지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그런 줄 알면서도 도망치려 하고 머리채 붙들려와서도 틈만 나면 또 나가려 하는 지지리 궁상맞은 현대인의 삶의 풍경이 떠오른다. 나아가 '용서해줘야 하니 일상이지 용서할 수 없다면 수행정진일 뿐'이라는 위안까지 얻게 된다.

주인공 페레는 파리에서 화랑을 경영하는 남자로 아내와 결별한 뒤 집을 나와 어느날 함께 일하는 조수에게서 북극에 침몰한 배에 고가의 예술작품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듣는다.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 끝에 북극행 쇄빙선에 몸을 싣고 어렵사리 물건을 구해 돌아온 페레.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잠깐의 부주의로 물건을 도둑맞고 그의 삶은 다시 원점, 아니 그보다 깊은 나락으로 빠져든다. 소설 후반부는 음모를 밝혀내는 추리소설적 구성을 띠고 있다.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이 소설의 힘은 인물의 형상화에 있다. 세수는 아래에서 위로, 면도는 오른쪽 뺨에서 왼쪽 뺨으로 하고, 여자는 주위에서 찾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두 명을 사귀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는 주인공 페레는 미워해서는 같이 살 수 없는 현대인의 원형 같은 인물이다.

소설의 묘미는 또한 짧은 문장을 구사하며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작가의 문체에서 나온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의 기절 장면을 "생체리듬이 파업을 일으켰다"며 묘사하는 식이다. 과거와 현재, 북극과 파리 등을 교차해 구조화한 소설의 긴박감 넘치는 구성과 빠른 장면 전환은 현대 소설이 어떻게 영화를 이겨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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