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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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불구대천지수(俱戴天之讐)란 말이 있다. 줄여서 대천지수(戴天之讐), 혹은 불공대천(共戴天)이라고도 하는데 문자 그대로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다. 『예기(記)』의 곡례(曲禮)편에 나오는 말로 원래는 '아버지의 원수'를 뜻했다(父之讐與共戴天). 그러나 요즘은 보통 '더불어 상종 못할 ×'쯤의 의미로 널리 쓰인다.

박정희(朴正熙)와 김일성(金日成). 이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도 없다. 바로 41년 전 오늘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냉전시대 첨병으로 맞섰던 두 사람은 맞수요, 경쟁자인 동시에 철천지 원수였다. 특히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자신을 살해하려 한 1·21 사태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등으로 김일성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둘다 고인이 된 데다 시대상황이 바뀌어 이들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이 둘에 대한 비교 연구도 활발하다. 20세기 한반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들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결국 역사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잣대를 걷어 올리고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들의 공(功)쪽에 포커스를 맞추면 이 둘의 관계는 한마디로 잘 사는 나라 만들기 경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토양 위에서 실험적 성격이 강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가난에서 해방시키려 했다. 물론 이 경쟁은 70년대를 고비로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는 게 정설이다.

싸우면서 닮는다고 둘 사이엔 비슷한 점도 많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최대의 과(過)로 꼽히는 유신을 선포하자 이해 12월 김일성도 주석체제를 도입한다. 새마을운동과 천리마운동, 자주와 주체, 예비군과 노농적위대 등도 따지고 보면 서로 비슷한 아이디어였다.

이들의 2세인 김정일 위원장과 박근혜 의원의 만남이 화제다. 그토록 매달리던 김대중 정권을 머쓱하게 만들 정도로 朴의원에게 '선물'을 듬뿍 안긴 金위원장의 속내도 큰 관심사다. 그러나 朴의원 개인에게는 부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1·21 사태에 대한 사과가 아마도 가장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백화원 초대소에서 둘이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다. 부친들 사이의 험난했던 시대를 상징하듯 격랑이 몰아치는 뒷그림이 특히 시선을 끈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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