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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73> 자연사박물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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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영화 ‘아바타’에서 남녀 주인공이 산책을 하며 사랑을 속삭이던 숲이 기억나세요? 발을 디디면 불이 켜지는 발광 이끼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역대 최고 흥행, 최단기간 흥행 등 9개 기록을 갈아치운 ‘아바타’의 힘은 상상력이었습니다. 나비족에서 발광 이끼까지, 모두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그 상상력의 기반에 바로 ‘자연사(自然史)’가 있다고 아주대 이종찬 교수는 말합니다. 그 나라 과학기술과 교육의 수준을 말해주는 자연사박물관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정선언 기자

자연사박물관은 그 나라 과학의 수준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 남녀 주인공이 발광 이끼가 떠다니는 숲 속을 거닐고 있다. 아주대 의대 이종찬 교수는 “아바타를 만든 상상력의 근원이 자연”이라며 자연사박물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중앙포토]

말 그대로 자연을 다루는 박물관입니다. 지질·광물·동물·식물 그리고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관련된 표본을 수집해 전시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 생명체의 진화, 더 나아가서는 지구와 이웃 행성들의 구성과 진화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박물관의 연구원들은 각종 표본과 자료를 토대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자연 현상을 연구합니다.

미국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과 백악관 사이에 자리 잡은 미국 국립자연사박물관은 방대한 전시물로 유명합니다. 지하 1개 층과 지상 2개 층으로 이뤄진 이 박물관에는 공룡과 과거 동·식물의 화석에서부터 아프리카 밀림의 코끼리, 북미의 포유류·고래뿐 아니라 광물과 보석·운석에 이르는 8000만 점의 표본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곳에선 120여 명의 과학자가 표본을 관리하고 연구합니다. 이 과학자들의 수집과 연구활동으로 매년 100여 점의 표본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네요.

미국의 자연사박물관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캘리포니아 아카데미 오브 사이언스’(California Academy of Natural Sciences)인데요. 세계 10대 자연사박물관 중 하나입니다. 1853년 설립된 같은 이름의 학회가 1874년 박물관을 개장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갈라파고스 군도 등지에서 채집된 각종 동·식물 표본이 전시돼 있습니다. 196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주 여러 대학에서 동·식물 표본을 제공해 소장품이 획기적으로 늘었죠. 하지만 1989년 일어난 지진으로 박물관 건물의 대부분이 부서졌습니다. 현재의 박물관은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2008년 재개관한 것입니다. 최신(最新) 자연사박물관이 된 셈이죠. 지하 수족관에는 각종 수중 생물이 사육 중이고 돔에는 열대우림이 재현돼 있습니다. 천문관과 공중정원·야외정원도 있죠. 연평균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5000개 이상의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는 미국에서는 자연사박물관을 포함한 과학박물관 방문자 수가 연 1억7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체 박물관 관람자의 40%에 육박하는 수치죠. 영화 ‘아바타’가 미국에서 탄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국립 자연사박물관도 유명합니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6600만 점의 표본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860여 명의 연구원이 매년 140억원가량의 예산을 쓴다고 합니다. 연평균 330만 명이 관람하는데, 이 중 25%가 외국인입니다. 원래 종합박물관 형태이던 대영박물관에 속해 있다가 1882년 대영자연사박물관으로 독립했죠. 분자생물학·동물행동학 등 자연사 연구의 최신 방법론을 적용해 활발히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은 7개 지역에 26개 연구소를 거느리고 있는데요. 직원만 2000명이 넘습니다. 세계 73개국에 연구진을 파견해 표본을 수집하는데 매년 200만 점씩 표본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놀랍죠?

유럽이나 미주의 선진국들은 17~19세기에 걸쳐 자연사박물관을 경쟁적으로 설립했습니다. 그래서 손꼽히는 유명 자연사박물관들이 대부분 유럽과 미주 대륙에 집중돼 있는 겁니다.

국내 자연사박물관도 늘어나

국내엔 1969년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이 최초로 세워졌습니다. 고(故) 이영노 이대 생물학과 교수가 김옥길 당시 총장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미술관 1층의 강의실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초대 관장을 지낸 이 교수는 “자연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절대 과학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김 전 총장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이대 생물학과와 지구학과에서 기증한 655점의 표본을 작은 강의실에서 전시했던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이었던 셈입니다.

이대 자연사박물관은 1997년 연면적 2000㎡ 규모의 신축 건물을 갖게 됩니다. 배경 그림 위에 모형을 설치해 만든 디오라마 전시실·무척추동물 전시실·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이대 자연사박물관이 보유한 표본은 총 21만여 점입니다. 이 중에는 천연기념물과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이 각각 47종·113종이나 포함돼 있습니다. 신종 및 미기록종을 증명하는 모식표본도 343점이나 됩니다.

경희대·한남대·경북대·충남대 등에서도 자연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규모 면에서 이대 자연사박물관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입니다. 2003년 문을 열었지요. 한강 등 서울지역 생태에서부터 공룡라운지·수족관라운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 지구의 탄생과 우주에 관해 다룬 지구환경관이 갖춰져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선 매년 300여 개의 강좌를 운영합니다. 학교 교과과정과 연계해 6단계로 나뉘어 있어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지난해 개관한 목포자연사박물관은 12개 전시실에 1만3000여 점의 표본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지질관·수중생명관·지역생태관 외에도 목포 출신의 서양화가 오승우작품관, 목포의 예술과 인물을 소개한 문예역사실도 함께 운영합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함께 있어 신안과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중국 송(宋)과 원(元)나라 시절 선박과 도자기·동전·총포류 등도 볼 수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은 자연사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제주세계자연유산·화산과 지질·육상생태계·해양생태계·제주민속실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야외에는 대형 용암석과 돌하르방·돌을 이용해 만든 맷돌 등 생활용구도 전시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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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이렇게 다양한 자연사박물관이 있지만 아직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없습니다. 1996년 설립이 추진됐지만 IMF 경제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됐었죠. 당시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개발연원(KDI)의 예비 타당성 조사를 거쳐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후보지를 검증하다 사업을 중단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최근 문화부에서 다시 내부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이러자 서울 노원구, 경기도 화성시, 인천시 강화군 등이 유치에 뛰어들었죠. 지자체들은 박물관 건립이 전액 국비사업이라 지역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14년 전 추정 사업비가 6500억원이라 현 시세로는 1조원을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게 지자체들의 계산입니다.

자연사박물관 전시는 어떻게 열리나

대부분의 자연사박물관은 상설전시 외에도 매년 기획전시를 엽니다. 기획전시 준비에는 1년가량의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전시할 표본을 수집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죠.

전시의 주제를 잡는 데만 2달가량이 걸린다고 합니다. 학예연구사들이 모여 어떤 전시를 열면 좋을지 회의를 하고 주제에 맞는 표본 수집의 가능성을 판단한 뒤 관련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습니다. 보통 2~4개 주제 중 하나가 채택되는데요, 채택되지 못한 아이디어도 나중에 전시로 기획될 수 있기 때문에 학예사들은 이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시 준비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 표본과 전시물 수집입니다. 연구원들이 직접 채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기증을 받거나 무료로 대여합니다. ‘기후변화와 생명의 위기’라는 주제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는 이대 자연사박물관에는 ‘가죽해면맨드라미’란 산호를 전시 중입니다. 원래는 아열대 바닷속에서 사는 산호인데 지난해 여름 이대 에코과학부 산호연구팀이 제주도 앞바다에서 처음 발견해 기증했습니다. 한반도 기후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가 국내 연구팀에 의해 발견돼 박물관에서 전시까지 된 셈입니다. 2008년 기획전시인 ‘동물의 흔적전(展)’ 당시엔 서울대 야생동물유전자원은행의 김영준 수의사가 큰 도움을 줬습니다. 야생동물의 유전자를 연구하고 있는 김 수의사가 구조활동을 다니며 직접 찍고 모은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발자국 사진 등을 기증한 것입니다. 2006년에는 개미 연구의 석학으로 꼽히는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 댄 펄먼 교수가 자신의 연구 자료와 사진 등을 DVD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이대 자연사박물관 서수연 학예사는 “학회 등에서 알고 지내던 교수나 연구원을 통해 필요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을 소개받아 수집한다”고 말합니다. 연구 및 교육 목적인 만큼 무료로 대여하거나 기증받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필요로 하는 자료나 표본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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